해방 80주년, ASEAN을 헤아리다

돌파구: 미국과 중국, 인도양과 태평양, 해양과 대륙

by 소묘

광복 80주년이다. 온갖 말들이 무성하다. 80년이면 1945년생이 팔순 잔치를 하는 대단히 오랜 세월을 지난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기억도, 경험도, 역사도 가물가물하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인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눈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그 어떠한 준비도 없이 해방이 “도둑 같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기뻤을 것이다. 동시에 두려웠을 것이다. 아무런 기반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누구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광복 후 해방정국 3년은 지옥과도 같았다. 온갖 정치 이념과 단체들이 난립하고,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상륙하고, 이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니 이제 총부리를 동포들에게 돌린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도, 소련의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이 목소리를 높였으나 점차 고착화되어 가는 미소 간 냉전 체제 속에 그들의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6•25 전쟁까지 터지며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뿌리 깊게 박혀 버렸다.


최근 잊힌 해방정국의 역사와 난립했던 이념들을 돌이켜 보는 중이다. 비극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상의 해방구를 열어젖히기도 했던 것이다. 제3의 길을 개척하고자 한 사상가들의 ‘초월적 민족주의’는 이승만의 일민주의(정확히 말하자면 이범석과 안호상)와 박정희의 유신정신으로 승화하여 한국의 근대화를 견인했다. 친미 일방이 아니었다. 민족의 정신을 단군의 홍익인간, 신라의 화랑 정신,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서 발굴해냈다. 한국 고유의 정신문화를 빚어내어 구미의 자유주의도, 소련의 공산주의도 아닌 한국의 실정에 맞는 토착적 민주를 실험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과 과오를 냉정하게 짚어야 한다. 그러나 한 인간 혹은 집단은 싸잡아 악마화하는 것은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하는 가림막으로 작동한다. 보고 싶지 않은, 듣고 싶지 않은 역사를 깡그리 묻은 채 이승만-박정희를 단순히 “독재자”로만 낙인 찍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자 호도인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등치시키는 것 또한 심대한 오류다. 이승만은 집권 초반 일민주의를 내세우며 독자적 이념을 제출했으나 6•25 휴전 이후 미국에 굴종적인 자세로 일관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반면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부터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하여 내발적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국가 엘리트의 수동적 정신을 통렬히 비판하며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한국의 처한 나약한 위상을 고려하면 대단한 용기이자 심오한 결단이다. 특히 월남전을 거치며 수세에 몰린 미국이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며 박정희는 ‘미국 없는 동아시아 안보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자주국방과 총화단결의 정신무장을 강조하며 총력전 태세를 갖춘 것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한국 고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한 시점도 유신 이후인 1978년이었다. 1979년, 수도권 과밀화로 인한 안보 위기를 심히 우려하여 세종시 천도 계획도 치밀하게 준비하던 중이었다. 만일 박정희가 피격되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떤 다른 경로를 걷게 되었을까? 무척이나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 사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주체정신 관련 정책 추친을 중단하고 친미 일방 노선으로 선회한다. 이후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역사는 줄곧 좌/우를 막론하고 ‘친미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역사적 배경과 사실에 대해서 아마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알려주려 해도 듣지도 않을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흐름을 시대적 맥락에 맞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당대의 이념과 논리는 작금의 실정과 합치하지도 않는다.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 전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왕년의 할리우드와 팝 문화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 문화에 필적하는 K-컬처 소프트파워를 발휘하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이 그 성취의 찬란함 만큼 더욱 깊어졌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국뽕 혹은 사대주의적 태도로만 양분되어 있는 낌새다. 여전히 속국의 근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다. 언제까지고 제국의 의로운 민족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눈과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더이상 ‘단일 민족’의 역사로 일원화 해서는 안 된다. 해방의 순간이 한반도에 국한된 역사만도 아니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순간, 대동아공영권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던 동남아시아도 일제히 '도둑 같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들 또한 준비가 미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심지어 아직도 제국주의적 야욕을 버리지 못한 유럽 국가들의 침공으로 인해 독립까지의 여정은 한국보다 훨씬 지난했다. 민족 간, 국가 간 분쟁과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베트남은 1965년부터 10년간 남북으로 나뉘어 끔찍한 동족 간 살육을 벌였다. 내전이자 냉전 체제의 국제전이었다. 한반도의 비극과 동남아의 비애가 무연하지 않은 것이다.


그 비극을 끝장 내고 평화 체제로 이행하고자 설립된 기구가 바로 ASEAN이다. 1967년 8월 8일, 태국 방콕에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5개국이 모여 창립했다. 이후 차츰 동남아시아 전역의 국가들이 참여하는 국제기구로 발돋움했다. 포탄의 연기로 자욱하던 동남아시아는 ASEAN의 협력 체제과 관리 체계 하에 단 한 번의 회원국 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평화의 지역으로 거듭났다. 최근 벌어진 태국과 캄보디아 간 분쟁도 더욱 심화되지 않도록 ASEAN이 관리하고 있다.


한국이 퀀텀 점프를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일국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광복절도 건국절이니 해방절이니 하는 자폐적 논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해방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복의 의미를 아세안과 함께 기념하는 것은 어떨까? 한국도 아세안과 같은 아픔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강대국 간 패권경쟁 하에서 평화와 공존의 지대를 공동으로 건설해가자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침탈의 역사를 가진 중국과 일본은 불가능하지만, 한국은 가능하다.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 미국과 중국 사이, 해양과 대륙 사이, 근본주의로 물들었던 근대의 잔혹한 역사를 청산하고 다문명•다지역•다체제 공존 질서를 주조해가는 최적의 파트너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아세안을 이해하려는 절실한 노력이 필수다. 한국은 아세안을 잘 모른다. 저가로 놀러다닐 수 있는 휴양지로만 여길 뿐, 그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전혀 애쓰지 않은 것이다. 한국이 제국의 소국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견고하고도 품위있는 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세안을 품어야 한다. 아세안 국가의 역사, 문화, 철학, 종교, 경제, 기술 등 그들의 필요와 요구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학습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