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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Tina Jan 06. 2023

우정을 지키는 방식에 대하여

<성적표의 김민영> 이재은, 임지선 감독

학창 시절에는 성적만큼이나 교우관계에 목맨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정해진 방식에 따라 생활하는 학교에서 가장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 옆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종일 잔뜩 엉기며 생활하다가 성인이 되는 순간 갈라진다. 보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어른의 세상에서는 우정보다도 더 많은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정희는 대학에 다니고 사회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는 과정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이 영화는 베스트 프렌드 '민영'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한 '정희'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수능을 앞두고 기숙사 생활을 하던 민영, 정희, 수산나는 삼행시 클럽을 만들면서 추억을 쌓아왔다. 하지만 수능이 끝나고 스무 살이 되고부터 셋은 각자의 길을 간다. 민영은 대학 새내기가 되었고, 정희는 테니스장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수산나는 해외에서 생활한다. 셋은 삼행시 클럽을 이어가기 위해 온라인 화상 프로그램으로 만나곤 했지만, 민영의 잦은 결석과 수산나의 불만에 의해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삼행시 클럽에 대한 의욕이 가장 넘쳤던 정희는 실망하고, 설상가상으로 테니스장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해고를 당해 붕 뜬 신세가 되어버린다.


어느 날 민영은 정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우울했던 정희는 이 소식이 내심 반가웠기에 놀거리를 잔뜩 챙겨 민영에게 향한다. 하지만 민영은 정작 성적 정정 메일을 모내느라 정신이 없다. 정희는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는 민영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민영은 의욕에 앞섰던 정희가 거슬린다. 영화는 민영의 툭툭 내뱉는 언행과 안중에도 없는 태도, 혼자 놀고 있는 정희의 모습과 같은 불편한 대치 상황을 가감 없이,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정희는 참아왔던 서운함을 토로하고 이로 인해 잠깐 친하게 지내는 듯하지만, 결국 민영은 성적 정정을 위해 정희를 홀로 남기고 학교로 떠나버린다. 정희에게 남겨진 것은 미안하다는 쪽지 한 장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희는 계속해서 민영과의 우정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야기에 앞서 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희는 다소 현실감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정 메일을 보내는 데 열중인 민영에게 정희는 뜬금없는 자신의 상상을 이야기한다. 상상 속 등장인물은 삼행시 클럽 멤버 민영, 정희, 수산나, 그리고 수능 이후 동질감을 느끼고 친해진 정일이다. 네 명의 인물은 몸으로 때우며 돈을 싹싹 긁어모아 당일치기 제주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착륙 지연으로 인해 그들은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넷은 단 5분 동안 창밖에 비친 제주도의 풍경을 보며 좋아하다가 비행기에 탑승한다.


정희는 이러한 상상을 민영에게 전달하며 즐거워하지만, 민영은 그저 헛웃음을 짓는다. 이 외에도 인생에 목표 하나 없는 정희에게 민영은 '앞날에 대해 뭐라도 고민하라며' 부추긴다. 그녀의 말처럼 정희는 유약하고 한심해 보인다. 그렇기에 남의 집에 홀로 남겨진 정희가 안쓰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화가 나서 민영에게 따지러 가거나, 말없이 서운한 마음을 삭혔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민영에 대해 정희가 내린 선택은 의외였다.




정희는 방에 들어가 세계지도에 붙은 민영의 사진들과 고3 때 썼던 다이어리를 뒤적거린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정희는 다이어리 구석 학창 시절의 민영이 자신에 대해 작성한 글도 함께 읽는다. 수영장에 가고 싶었던 민영에게 물안경을 씌워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고 놀던 날이었다. 민영은 정희의 기발함에 늘 압도당한다며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이날 발생한 사고에 의해 다리를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사과 한 마디 없던 정희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은 정희와의 기억이 행복했음을 다이어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정희는 민영의 흔적을 계속 찾는다. 그간 민영이 숨겼던 꿈, 대학 이후 친구들 이야기와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정희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마음은 민영을 도리어 이해하게 되었다. 아주 오랜 친구라도 모든 면을 알 수 없듯, 정희는 이제야 민영을 알아본다.


스물 이후 어딘가 달라진 민영을 보며 당황하던 정희는 이를 외면하기보다는 새로운 면을 알아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으로, 정희는 자신이 그동안 봐왔던 모습들과 민영의 새로운 흔적을 바탕으로 성적표를 만든다. 사회성, 패션 감각, 공감 능력 따위의 항목으로 세세하게 적힌 민영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의 것이었다. 정희가 전하는 성적표는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의 조언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영화를 통해 이상적인 친구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현실 도피와 우정 결속을 위해 만들었던 삼행시 클럽은 어른이 되고 현실을 마주하면서 어그러졌고, 죽이 잘 맞았던 민영과 정희도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이와 함께, 둘 사이의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들은 관계에 금이 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와 대비되어 보여주었던 정희의 상상 속에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추억이 있었다. 원래 목적이었던 제주 여행은 비록 5분밖에 즐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넘길 수 있는 상황들은 정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패기롭게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희는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상상을 민영이 공감하길 바랐다. 그만큼 자신이 사랑했던 친구와 특별한 추억을 쌓는 경험이 간절했기에.


하지만 갈등과 이로 인한 불편함도 분명히 우정에 포함되는 요소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민영의 성적표이며, 이를 작성하는 정희의 모습에서 둘의 우정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끊임없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자신에게 소홀했던 민영이지만, 여전히 그녀를 좋은 사람이자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한다. 우정은 가끔은 미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영화는 어른의 삶에 대해 시사한다.

정희와는 다르게 민영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민영은 자신의 대학교에 한국인이 많은 것이 끔찍하게 싫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한국인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민영 자신의 모습을 내포한다. 세계지도에 붙인 여행 사진들처럼 민영은 자신이 한국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정작 정희가 살핀 민영의 모습은 그녀가 말하는 한국인의 특징과 닮았다. 민영은 성적 하나에도 불안하거나 초조해하며, 대학 시절 친구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정작 오랜 친구의 말은 현실성이 없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민영을 그저 나쁘게만 바라볼 수는 없는, 그저 인간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똑같이 학업을 고민해온 학생들이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각기 다른 고민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현실에 치여 끙끙 앓는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청춘들은 수많은 갈등을 마주하며 한국인의 삶에 적응해 간다. 하지만 대학에 가지 않고 일도 그만둔 정희는 여전히 학생 시절에 꿈꿨던 이상적인 모습에 기댄다. 어떻게 보면 가장 미성숙한 인물이지만 '한국인의 삶'에는 가깝지 않다.


정희는 한결같다. 그녀는 삼행시 클럽에서 끝까지 우정을 지켰으며, 여전히 재치 있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극복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정희는 성적표를 통해 우정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보인다. 민영이 부러워하기도 했던, '정희'다운 여전한 발상이다. 또한 정희는 민영을 친구로서 사랑한다. 정희는 민영을 '자신이 이상한 이야기를 할 때 밖이 아닌 안에서 봐주는 친구'로 생각한다. 이 생각이 바로 우정을 지키고 싶었던 이유가 아닐까.




성적표를 작성하며 담담하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정희를 보며, 사회에 편승하며 현실에 수긍하는 태도가 어른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이해, 포용과 같은 가치들이 어른다워질 수 있는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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