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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Tina Jan 13. 2023

현실 부부의 고군분투 촬영기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박송열, 원향라 감독

저예산 카메라로 찍은 듯한 샷과 깔끔하지 않은 음향, 어딘가 어색한 대사와 행동. 영화의 엔딩까지 보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이어 나오는 엔딩 크레딧에서 비로소 '아하!' 소리가 나왔다. 이 영화는 박송열-원향라 부부가 배우, 감독, 스태프 역할을 모두 해낸 작품이다. 즉, 단 둘이서 모든 제작 과정을 마쳤다.


두 감독은 실직한 후 대리운전과 교사 아르바이트 등의 일용직을 전전하는 영태와 정희 부부의 고군분투에 대해 그렸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감독의 눈을 버리고 우리 주변 인물의 시선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어떠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스토리를 과장하거나 연출에 멋 부리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뿐이다. 이러한 슴슴한 이야기 전개는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우리 주변 인물들의 삶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일자리를 찾는 영화 속 부부의 모습은 다소 무기력해 보이지만, 그들은 소소한 행복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일과가 끝나면 항상 술잔을 기울이는 부부의 모습에는 서로 간의 애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부부는 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정희의 모친 생일날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빈 손으로 방문하는 부부, 친한 친구에게 손을 벌리는 정희와 일자리를 찾다가 다단계에 걸려들 뻔한 영태. 어느새 그들의 인간관계는 돈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들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하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에게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특히 영태는 빌려준 카메라를 제멋대로 팔아버린 명수에 의해 감정이 무너진다.


관계의 상처 속에서 서로 간의 신뢰 또한 위태로워진다. 힘든 생활을 보내면서도 '그래도 사채는 쓰지 않았잖아.'라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부부는 점점 감정적으로 변해갔다. 부부 사이에 지키기로 한 선은 정희가 몰래 쓴 사채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영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버리고, 정희는 일일 특활 교사로 일하고 번 돈 8만 원과 사채로 빌린 300만 원 사이에서 자신의 가난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며 절망한다.




영태는 명수에 의해 인간에 대한 불신이 생길까. 그리고 사채에 발을 담은 정희는 계속 그곳에서 돈을 빌리게 되는 것일까. 부부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잃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성을 지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영태는 명수에게 카메라 값 300만 원을 겨우 돌려받았지만, 자신과 똑같이 가난한 처지의 그를 생각하며 불편해한다. 초반의 정희 또한 카메라를 돌려주지 않는 명수를 이상한 사람이라 의심하지만, 자신의 사채 빚을 대가 없이 모친이 갚아준 이후 영태의 인간성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가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기는 처지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영태는 자신이 받은 카메라 값에서 100만 원을 명수에게 그냥 돌려준다. 돈 앞에서 굴복할 뻔한 상황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성을 되찾고 서로 간의 신뢰를 회복한다. 부부는 잘 견뎌보자는 의미로 처음 그랬던 것처럼 악수를 한다.


부부의 삶은 보통 생각하는 '가난함'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아 어떠한 동정도 이끌어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처지가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해결되지도 않는다. 영태의 선택은 명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이러한 태연한 모습에 화가 난 영태는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앞으로도 이 부부는 가난 앞에서 자신들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저 그런 삶을 이어갈 것 같다.




보통의 영화 제작 과정은 완벽해야 해서 어렵다. 하나의 샷을 작업하더라도 많은 스태프가 동원되어야 하고, 연출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좋은 기술도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어색한 부분이 생기면 관객들은 불편한 감정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러한 부분을 숨기지 않는다. 풀 샷도, 웨이스트 샷도 아닌 애매한 구도도, 인물의 대사가 다소 묻히는 배경 소음도 감독은 상관없어한다. 어떻게 보면 관객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정확하게 자리 잡은 인물의 위치와 포커스를 본다면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두 감독의 상당한 노고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스토리는 화면 밖의 제작 과정과 닮아 있다. 각각의 삶에서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받은 영태와 정희는 서로에게 더욱 의지한다. 이러한 상황은 오직 두 명이서 장편 영화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전전한 실제 박송열-원향라 부부의 촬영기와 비슷하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영태-정희 부부가 서로 악수하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화면 밖의 박송열-원향라 부부가 배우이자 스태프로서 서로에게 격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력도, 자본도 부족했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작업 환경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 또한, 돈이 아닌 신념을 지키는 영화 속 부부의 삶과 닮았다.




초반의 필자는 '웰 메이드 독립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얼기설기 직조한 듯한 이 영화를 보며 어색하고 불편한 부분이 어디인지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작성하면서, 좋은 독립 영화는 기술, 플롯, 미장센 어느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영화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들을 허용했기에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독립 영화의 매력이 아닌가.


또한 필자가 짤막한 영화를 만들 당시, 다른 이의 삶을 바라보며 '어떤 삶이 좋은 소재로 쓰일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겪어본 적 없는 삶에 대해 끝없이 파헤치고 따져보려는 느낌이 들어 곧 그만두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누구에게나 상처가 될 수 있는 '가난'을 이용하려는 느낌이 없었다. 격동적인 연출로 관객들의 흥미를 이끌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현실 부부 감독의 배려가 돋보인다.




이 영화는 사람들의 감정을 고조시킬 하이라이트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은 어렵지만 곧 나아지는 상황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인생이 달라질 정도의 큰 변화는 없지만, 갈등과 안정을 반복하며 그리는 작은 물결 같은 영화이다. 가장 극적이어야만 환호를 받는 것이 영화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 극적이지는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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