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받아들이는 초록빛 여정

<그린 북(2019)> 피터 패럴리 감독

by SonaTina
There will be a day sometime in the near future when this guide will not have to be published. This is when we as a race will have equal opportunities and privileges in the United States.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이 가이드 북이 출간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인종으로서 미국에서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갖게 되는 때에 말입니다.


‘흑인 운전자들을 위한 그린 북(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의 서문이다. 1936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이 만연했던 시기에 ‘빅터 휴고 그린’이라는 흑인 우편배달부가 처음 제작한 안내서이다. 당시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짐 크로우 법’에 따라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소들이 정해져 있었고, 백인 전용 시설에 들어갔다가 테러를 당하는 사례도 빈번했다. 그렇기에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 호텔 등을 정리한 ‘그린 북’은 흑인 운전자들이 미국 남부 여행 시 필수로 들고 다녀야 할 물품이자, 오늘날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잘 드러나는 도서이다.


동명의 영화 <그린 북> 역시 인종 차별이 있었던 1960년대의 미국을 그려냈다. ‘떠버리 토니’라고 불리며 거친 인생을 살아왔던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과 기품을 중시했던 천재 피아니스트 ‘도널드 셜리’의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 이야기로 말이다.


common-4.jpeg


클럽에서 고객 관리를 맡으며 산전수전을 겪어왔던 토니는 셜리 박사의 미국 남부 콘서트 투어를 무사히 끝내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그의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다. 계약 첫날 토니가 ‘흑인 운전자들을 위한 그린 북’을 받으며 그들의 어색한 여정이 시작된다.


common-6.jpeg


살아온 배경이 완전히 달랐던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먼저, 셜리 박사는 토니가 기존에 생각해 왔던 ‘일반적인 흑인들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리틀 리처드'와 같은 흑인 음악에도 문외한이고, 매사에 거침없이 행동하는 토니와는 다르게 점잖은 말투와 함께 품위를 중시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인정받더라도 무대 밖에서는 그저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조롱을 받아왔다. 셜리 박사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중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좁게는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넓게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가 뉴욕이 아닌,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에서 투어를 진행하는 것을 선택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의 염원이다.


토니는 이러한 셜리 박사의 모습을 ‘별종’으로 생각한다. 셜리 박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는 다른 백인들보다는 덜하지만, 토니 역시 유색 인종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있던 인물이었다. 초반의 토니는 유독 셜리 박사를 향해 ‘당신네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고, 고상한 박사보다 자신이 오히려 ‘흑인에 가깝다’라고 말하는 등 셜리 박사를 자신과 다른 ‘인종’이라는 집단으로서 상대해 왔다. 그전에는 자신의 집에 방문한 흑인 가정부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거나, 흑인들이 사용했던 컵을 그대로 휴지통에 버리는 등 본인 역시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있었던 일반적인 백인들 중 하나였다.


common-5.jpeg


하지만 토니는 점차 셜리 박사를 집단이 아닌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공연장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는 일의 일부로서 셜리 박사를 형식적으로 대했지만, 천재적인 재능에 비해 셜리 박사가 받는 부당한 대우를 직접 목격하면서 그의 심정을 점차 헤아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는 셜리 박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보통의 유색 인종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셜리 박사는 자신을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라 느끼며, 토니와의 갈등 상황에서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내비친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죠?”

<그린 북(2019)> 도널드 셜리의 대사


이러한 외침을 통해 비로소 셜리 박사의 내면을 알게 된 토니는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 직접 표현하라고 조언한다. 이후 셜리 박사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앞두고 인종 차별을 근거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지 못하게 하는 주최 측의 태도에 맞서 “공연을 하지 않겠다”라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common-7.jpeg


영화는 차별이 만연했던 사회적 배경 속 두 사람의 성장과 우정 서사를 그려낸다. 이는 긴 여정을 떠나는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로드 무비’의 대표적인 특징과도 어우러진다. ‘차량’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주된 장소로 삼아,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사회적 통념과는 반대로 백인인 토니가 유색 인종인 셜리 박사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면서 두 인물의 기이한 동행이 시작되고, 이로 인한 크고 작은 난관을 겪는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되면서 서로 반대되는 면모를 가지고 있던 둘은 서로에 의해 점차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차별적인 사회적 배경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그린 북’이라는 상징적 소재가 발단이 되어, 상반되는 두 인물의 관계 변화를 로드 무비로 그려낸 덕에, '다름'을 받아들이고 진실한 우정을 쌓는 과정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common-8.jpeg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셜리 박사가 부당함을 참아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언제나 품위를 지키려는 태도는 억압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방어 기제로 보이기도 한다.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던 셜리 박사는 성격도, 자라온 환경도 완전히 다른 토니와 우정을 쌓으며 비로소 맞설 용기를 낸다.


이후 박사는 토니와 함께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벗어나 작은 주점에서 클래식 공연을 한다. 모든 감정을 해소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셜리 박사의 모습은 유난히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두려움인가, 사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