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들 간의 거리'가 시간이다.
상해에 와 있다.
평소 쉬는 날이면 호텔방에 콕 박혀있는 편이지만,
오늘은 화창한 날씨가, "얼른 옷 입고 나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좋은 날씨에 한번 길을 따라 걸어보자!
10분을 걸었을까, 마치 근대사 배경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법한 세트장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느낌이 팍! 하고 오는 아주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았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만큼은 계획적이지 않다. (삘이 중요하다.)
카페 입구를 지나니 정원이 나왔다. 더 깊숙이 들어갔더니 중정이 나온다.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차 한잔만 하기에는 아까운 공간과 날씨였다.
최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 생각이 복잡한 일을 마쳤다.
오늘은 비워내는 시간이다.
나는 머릿속 생각이 많아지면, 일단 종이와 펜을 들고 막 적는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어가 말썽이다.
구글 번역기로 아등바등 펜과 종이를 빌려 끄적끄적 적기 시작했다.
오늘 주제는 너로 정했어.
"시간"
오래전부터 나는 이런 반문을 해왔다.
올해는 뭐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이렇게 다 지나가버렸지?
딱히 한 게 없는데, 이번 주, 이번 달이 다 흘러가 버렸네...
어느 시점과의 거리가 너무 얇게 느껴진다.
반면, 이런 경우도 있다.
"그때가 올해였어? 난 작년인 줄 알았는데..."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지만 너무 밀도 있게 채워져서 훨씬 오래된 사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2015년은 끊임없는 사건(Event)의 연속이었다.
그 해 봄과 가을, 두 번이나 가족들과 '보라카이'를 여행했다.
너무 좋았던 기억에 또 갔던 여행지. 그런데 가을 여행을 하던 중, 우리가 지난 보라카이 여행을 갔던 게 작년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4~5개월 전 일이었지만, 훨씬 더 오래된 사건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 우리는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일까?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의 삶에 큰 변화가 있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다니던 국내 직장을 퇴사했고, 해외 취업을 하면서 이주를 결정했다.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던 5살 아들이 먼 외국까지 와서 유치원에 적응하는 과정은 하루하루 도전의 연속이었다. 삶의 큰 전환점이었던 만큼, 그 기간 동안 시간의 밀도가 아주 짙었다.
2019년 또한 진한 시간의 밀도를 경험한 해였다.
업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월 초 한 겨울에 가족들과 아이슬란드로 떠났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대략 2-3일 만에 항공권, 숙박, 렌트카 모두 예약하고 짐을 싸서 떠났다. 하지만 챙겨간 옷이 문제였다. 당시 우리는 겨울이 그리 춥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에 떨며 여행을 했지만, 그 추억 또한 강렬했다.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겨울 여행을 마쳤었다.
그 당시 '부캐'라는 키워드가 유행하던 때였고, 나도 그랬다.
회사에서는 본 업무 외에도 별도의 프로젝트를 맡았고, 퇴근 후에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며 제품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택배를 포장했다. 하프 마라톤 대회와 산악 마라톤 대회도 참가했고, 가족들과는 여행을 종종 다녔다. 그와 동시에 실전 투자에도 집중하며, 나의 모든 관심사를 놓치지 않았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다양한 사건(Event)으로 채워졌고, 그만큼 시간의 밀도는 극대화되었다.
그 해 8월, 무더운 여름 나는 또 한 번의 퇴사를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 갑자기 아이슬란드 여행이 떠올랐다. "그때가 작년이었나?"
폰 앨범을 찾아보니, 불과 7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시간의 밀도가 너무 짙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져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대기업 회장이든, 정치 지도자든, 누구나 하루는 24시이니까.
(빈부는 아니라도) 시간만큼은 공평해! 라며 안도하게 된다.
글쎄...
고대 철학자들도 시간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다. 주관적인 개념으로 설명한다.
현대 과학자들 역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은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니 흐르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는 한 사건을 인지하기 위해 시간을 도구처럼 활용할 뿐이다.
아무런 사건이 없다면 기록할 시간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은 '시각'이며, 그 순간들이 연결되는 간격이 '시간'이다.
결론적으로 시간은 '사건'과 '사건' 사이의 거리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으로 1년을 보내고 나면, 언제 시간이 이만큼 흘렀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기록할 만한 사건(이벤트)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삶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사건들이 아주 드문드문 일어난다면, 즉 사건들 간의 간격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옅은 밀도), 우리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올해 3월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느덧 12월이 되었고,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헉! 벌써?"
만약 한 해 동안 기억할 만한 사건이 몇 개 없었다면, 그 시간은 허무하게 녹아버린 것이 아닐까?
* 이 글에서 말한 사건을 이벤트(Event), 즉 바꿔 말해 컨텐츠 (Content)라고 하자.
우리의 삶을 다양한 콘텐츠로 가득 채워 나가면, 시간의 밀도는 높아질 것이다.
- 최근 자기 계발 콘텐츠에서 말하는 ‘다이어리 쓰기’ 방식처럼 매일을 촘촘히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도 시간을 단단히 묶어가며 관리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긴 호흡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여러 개 두고 유닛 단위로 끌고 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정말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걸까?
결국 우리가 시간을 채우는 방식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 않을까.
이날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글로 풀어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