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을 치르고 영웅본색을 보며 우정을 외치던 중딩 피날레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나는 <응답하라 1988> 의 친구들보다는 딱 두 살이 어렸던 중3이었고..
"이 사람, 믿어주세요." 라고 말하며 '보통 사람들의 대통령'을 표방한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했지만
중학생에게는 다를 것이 없었던 날들이었다.
올림픽을 위한 학교에서의 각종 행사들 - 글짓기, 포스터, 표어 등 - 이 활발히 개최되었고
학교에서의 단체 관람은 없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학생들 관람을 위한 할인 티켓 같은 것도 줘서 친구들과 레슬링 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올릭픽 개막식에서 굴렁쇠를 굴리고 주경기장을 달렸던 '굴렁쇠 소년'을 나도 TV로 보았고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는데,
이것은 훗날 첫 직장을 지원하는 데 영향을 주는 스토리라인이 있다. (그 때까지 이 글을 계속 쓰게 된다면 나오겠지..)
올림픽 행사와는 별개로
이 즈음 우리는 홍콩 느와르 액션 영화에 심취해 있었다.
지난 해 겨울에 보았던 전설의 명작 <영웅본색>이 결정적 계기였다.
동시대의 키즈들이 대부분 동의할 것으로 예상되듯
영웅본색에서 바바리 코트를 입고 성냥개비를 물고 쌍권총을 난사하던 주윤발 형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음 만나는 멋 그 자체였다.
비정한 세상의 암투와 배신, 가족간의 갈등과 사랑, 남자의 의리라는 주제들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었고 주제가 또한 너무나 좋았다.
영화를 본 후 우리들은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다니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바바리 코트를 몰래 꺼내어 입고 나가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Tq0rVrz-KQ
87년에 개봉한 영웅본색의 전편에 이어
88년에는 영웅본색 2가 나왔는데
한 해동안 적어도 비디오로 5번은 넘게 보았을 듯 하다.
여기에서는 전편에서 죽었던 주윤발이 쌍둥이 동생이라는 설정으로 다시 나타나서 개연성을 약간 방해하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형의 코트를 입고 종횡무진 엄청난 액션을 보여주는 광경을 보면서 그런 사소한 문제는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가 되고..
2편에서는 동생 장국영이 최후를 맞이하면서 공중전화 박스에서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개구장이 중학생 녀석들이었지만 그 장면에서는 모두들 눈시울이 벌개지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우리들은 여학생보다는 동성의 친구들과의 우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의식 같은 공감대가 있었던 듯 하다.
남자들만의 의리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따로 여자친구를 만나거나 그런 쪽을 우선시하면 배신자인양 의리가 없는 소인배인 양 치부하는 우리들만의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서 잘못 하면 남녀차별이니 하여 큰 봉변을 당할 만한 말들도 많이 하며 지냈던 것 같고...
(그러나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어려서 그랬지 뭐' 하는 자성을 하게 된다.ㅎ)
그래서 그때는 친구녀석에게 편지를 받기도 하고
나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자들끼리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게 오글거려서 제 정신이었나 싶기도 한데..
그 때의 나름 순수했던 시기에만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Cn08xkRgh4
그렇게 우리들의 우정이 영원할 것 처럼 믿었고
또한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 처럼 늘 붙어 다녔던
나와 친구들의 중학생활은
고등학교 선택을 기점으로 하여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중학교와는 또 다른 세상으로 올라간다.
내 딴에는 진급이라고 생각했지만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의 신분상승은
좋은 것만 있는 진급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