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정체성과 자신의 행복에 대한 고민 끝에 뉴욕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장기여행을 떠난 주인공 리즈는 이탈리아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한 친구가 묻습니다. '너의 주제어는 뭐냐'고요. 리즈는 '저널리스트'라는 직업 등을 말하며 자신을 설명해보려 하지만 그 소개는 퇴짜를 맞습니다. 그런 건 진정한 주제어가 될 수 없다나요? 결국 그 자리에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채 오묘한 표정을 짓던 리즈는 여행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주제어를 '아트라베시아모(함께 건너자)' 로 정하고 영화는 리즈의 행복한 웃음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영화 <Eat Pray Love> 2010 스틸컷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은데, 저도 '나의 주제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름, 성별, 나이, 직업, 이런 인적사항을 제외하고 나를 소개하려면 어떤 단어들이 필요할까. 모든 외적인 것들을 빼고 나면 '진짜 남는 것',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남은 내 알맹이는 어떤 모습일까.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질문들은 답을 찾지 못해 방치되었고 나는 어느새 선뜻 답을 찾지 못하던 리즈와 같이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몰랐습니다. 주제어란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마음에 품고 많은 일들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에게로 오는 것'이란 것을요. 결국 몇 차례의 고민들은 속에서만 맴돌다가 금방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의 십 년이 지나 '내가 누구인지 점점 더 모르겠는 어른'이 된 나는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당장 이직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이건 존경하던 할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새롭게 커리어 고민을 시작한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나를 이토록 모르겠다니. 그간 잘 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혼란스럽고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생각의 벽에 부딪히고 정체된 나는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걱정이 멈추어 지지 않는 머리를 쉬고 싶을 때에도 영화리스트를 뒤적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 이 영화를 발견한 나는 이해조차 어려웠던 리즈와 같은 모습으로 모니터 속 리즈를 마주했습니다. 10년 만에요. 그리고 자신의 주제어를 찾기 위해 용기내서 일상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아이처럼 헤매는 리즈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단 것을요. 행복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기억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요. 어린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내가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었어야 했다는 것을요. 계속 자라고 변화하는 나에게 주제어를 물어봐주고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여전히 아이같은 나의 마음을 돌아보고 돌보았어야 했습니다.
영화 <Eat Pray Love> 2010 스틸컷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마주 한 영화를 보며 나는 내 주제어를 '기억하자'라고 정했습니다. 오래도록 내가 좋아했던 것들, 좋아하게 된 날의 기분좋은 추억들, 사랑하는 사람들, 동화같이 꾸었던 꿈, 따뜻한 마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 기억들을 꺼내 보고 오늘을 따뜻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이 되려 합니다. 어린 날의 감정들을, 자식이었을 때, 후배였을 때, 을이었을 때의 마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좀더 다정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그러려면 매일같이 노력해야할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중요한 것들을 빨리 잊어버리기 일쑤이니까요. 그러기 위해 오늘도 관찰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려 합니다. 오늘 어느 입장엔가 속해있던 나, 마음을 움직였던 일들과 감정을, 특히 다정한 삶을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생각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