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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사원 Aug 31. 2018

김애란 소설집 <비행운>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휴식이 필요했다.


지금의 내 위치는 무엇인지, 나는 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고 머릿 속을 비운 채 심호흡을 크게 하여 쉴 틈이 필요했다.

쉬는 동안 완독하리라 마음 먹었던 첫 책은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  내가 만난 김애란 작가의 첫 책이다. <비행운>은 한때 즐겨 듣던 '비행운'이라는 노래의 제목과 이름이 같았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아!'하고 울리던 가슴 속 깨달음만큼 책에 대한 감동의 깊이도 남다르리라 기대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이야기를 더듬었다.



 '비행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비행운(飛行雲)'은 영어로 contrail, 높은 고도에서 비행기가 날 때 뒤에 꼬리 모양으로 길게 나타나는 얇은 구름을 말한다. 비행기가 날아간 흔적이라고 하면 좋을까. 둘째, '비행운(非幸運)'은 말 그대로 행운이 아닌 비극을 뜻한다.


소설집의 제목처럼 김애란의 <비행운>은 비극적이어 견딜 수 없을만큼 우울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행복한 끝맺음이란 없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행복의 문턱 앞에서 좌절하거나 망의 불빛조차 보지 못한 채 어둠 속 침전한다. 이런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니 내 인생은 그저 평범한 20대 여성의 하루에 불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도 이들과 같은 시궁창은 아닐까, 한 줄기 희망은 애초에 없었던 게 아닐까하는 엉뚱한 우울감이 솟기도 했지만.


소설집을 이루고 있는 여 이야기 모두 소름끼치도록 인상적이었다. 하나같이 현실감이 넘쳐 마치 친한 친구의 이야기나 옆집 아줌마의 모험담을 듣는 듯 했다. 현실에 없을 듯 비극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사실적인 주인공들의 하루가 나는 정겨우면서도 눈물겹다. 비행운(飛行雲)을 꿈꾸지만 비행운(非幸運)에 몸서리치며 현실에 아파하는 그런 사람들.

특히 노래 '비행운'의 가사가 떠오르던 맨 마지막 단편 '서른'이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다. 서른이 되도록 열심히 살아도 이 모양인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주인공 수인. 수인은 이십대 초반에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 편지를 쓰며 고해성사 형식으로 단편을 꾸며나간다. 그녀의 고달픈 삶과 그녀가 꿈꾸었을 이상이 겹쳐 보이며 마음이 쓰렸다. 본래 이상을 꿈꾸는 인간 꿈꾸는 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기 십상인데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본 수인의 일상은 얼마나 끔찍할까. 나라면 수인처럼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서울숲 차(茶) 전문점 '맛차차'의 맛차블랑


다행인 것은 모두에게 각자의 결핍이 있다는 거다.


나만 뼈저리게 느끼는 결핍이 아니라는 것. 애석하게도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심지어 나보다 더한 결핍감을 갖고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생각하고나니 이기적이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다.


결국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인생이다. 누군가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며, 누군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회사 선배가 그랬다. 회사엔 내 편이 하나도 없다고. 사실 맞는 말이다. 잘하면 나의 공이고 못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게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의 인간 습성이니까. 슬프지만 나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가시덩쿨에 혼자 뒹굴고 있는 셈이다. 언젠간 이 미로를 탈출하겠지. 언젠간 이보다 나은 곳에서 뒹굴겠지 하는 자기 위로를 하며.


사람들은 누구나 비행운을 쫒는다. 각자 꿈꾸는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비록 그것이 이 사회의 성공 잣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상의 옳고 그름을 쉬이 가름할 수 없다.

요즘엔 자책하는 일이 많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10에 도달해 있는데, 실상 나의 모습은 1 또는 2 제대로 거치지 못한 아마추어 같아 마음이 저린다.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 속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자책다. 그러다보면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언제쯤 '탓'을 거둘지 궁금증이 솟는다. 창밖의 타인도 나처럼 자책하며 사는 삶인지, 내가 유독 유난스러운 것인 정답은 없지만서도.


혼란스러운 하루 속에 짓눌리다 숨을 돌리며 김애란의 <비행운>을 만났다. 앞길 컴컴하게  절망적인 사람의 뒷편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는 사람이 서있다. <비행운>을 읽으며 마음에 들었던 점은 불행으로 점철된 누군가의 삶을 불행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로 재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피엔딩은 커녕 앞으로의 삶에 대한 방향성조차 가늠하기 어려워서 주인공들이 나와 같은 시공간에 살아 숨쉬는 인간인냥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엔 작가가 야속했다. "아니 이렇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맺지도 않으면 어쩌란 말이에요. 작가양반!"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단편 하나 하나 거듭할 수록 내 안에 쌓여가는 희망과 위로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작가는 등장인물의 을 비극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 아닐까? 설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비현실적으로 행복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아픔이 도드라져 보일테니, 네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따듯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느낌이었다.


나는 원체 우울함에 쌓여있는 인간이라 비슷한 류의 사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반갑다. 반가운 마음 뒤로는 연민이 따르지만. 각자의 삶에 대한 동정도, 위로도 결국은 내 몫이다. 타인에게 빌어 받은 위로가 개운하지 않듯이.

<비행운> 속을 떠다니는 모두의 삶을 연민하고 축복한다. 나아가 <비행운>을 통해 '삶'에 대한 무기력에서 한걸음 물러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다.


여덟가지 단편 중 가장 아렸던 마지막 단편, '서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독서 감끝마친다.


학생 중에는 평소에 저랑 한마디도 안 하다 이따금 딸기 우유나 초콜릿을 건네고 가는 여중생도 말수 적고 속이 깊어 언제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남고생도 있었어요. 공부를 하도 한 탓에 수업 중에 코피를 쏘는 아이도,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토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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