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틱틱

by 송이

어릴 적 나의 별명은 깜빡이였다. 남들보다 눈을 더 자주, 심하게 깜빡거렸기 때문이었다. 안면 근육을 잔뜩 찌푸리면서 눈을 깜빡였기 때문에 매우 보기가 싫었다. 내 눈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깜빡였고 엄마는 나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자주 혼을 내셨다. 하지만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 그 습관은 엄마의 잔소리로도, 친구들의 놀림으로도 고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여러 대학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명도, 깜빡임의 이유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자주 눈 깜빡이는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하며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그래서 반에서 1등도 하고 반장도 하고 그랬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고학년이 될 때까지 깜빡이, 신호등이라며 놀려 댔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언젠가는 이 나쁜 습관이 고쳐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 습관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건 고칠 수 있는 습관이 아닌 심각한 병이라는 걸 안 것도 대학을 입학할 무렵이었다.

대학에서 나는 관광경영학을 전공하며 승무원 준비를 했다. 긴 시간 나의 꿈이었던 승무원이 되기 위해 학점 관리와 영어 공부는 물론 내적, 외적으로 승무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승무원 학원에 다니면서 마지막 점검을 했는데 학원에서 모의 면접을 볼 때마다 나의 눈 깜빡임은 내 발목을 잡고 말았다.

사실 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학원 선생님들은 나의 눈 깜빡임을 걱정하셨다. 외모를 많이 보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갖기에 나의 눈 깜빡임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꿈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사실 눈 깜빡임이 심했기 때문에 면접에서 통과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승객을 직접 대하는 직업인데 누가 눈 깜빡이를 뽑아 주겠는가. 안 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도전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대학병원에 다니며 눈 깜빡임 치료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안과. 신경과. 신경정신과 등등의 과를, 여러 병원에 다니며 치료하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완치의 방법은 없고 약을 먹으면서 깜빡임을 완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이라도 쓰고 싶어서 열심히 약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치료와 승무원 준비를 함께 하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항공사 승무원 채용 공고가 떴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승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예쁘게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사진도 찍고 입사지원서도 정성스레 적었다. 면접 준비도 열심히 하면서 나는 병원도 열심히 다녔다. 평생 나를 괴롭혀 온 나의 눈 깜빡임이 나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하루 나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다음은 면접이었다. 나는 면접에 참여한다는 설렘과 동시에 걱정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과연 내가 면접장에서 얼마나 눈을 깜빡이게 될 것인지 너무 걱정되기 시작했다.

면접 당일 나는 새벽부터 예쁘게 메이크업을 받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그날, 같이 면접이 있어 동행한 친구는 내가 면접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 손을 잡고 응원의 말을 전해주었다.

“네가 눈을 남들보다 자주 깜빡이는 건 세상을 좀 더 빠르게 보려고 그러는 거라 생각해. 자주 깜빡이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준비한 대로만 면접 잘 봐.”

따스한 친구의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친구는 나와 함께 승무원 준비를 하며 내가 얼마나 승무원이 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어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 결과가 나왔는데 역시나 불합격이었다. 슬프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미 불합격을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떤 요소가 부족해서 불합격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 깜빡임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리라.

그렇게 내 오랜 꿈이었던 승무원은 청춘의 한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승무원 시험 불합격 이후 나는 눈 깜빡임의 구애를 크게 받지 않는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전공을 살려 가고 싶었던 호텔도, 여행사도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했다. 눈을 너무 깜빡여서 안 되겠다는 피드백을 들었을 땐 정말 울고 싶었다.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고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상태로 취업도 힘들다니 정말 괴로웠다.

그렇게 취업 준비를 하면서 나는 동네 면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했다. 다행히 합격해서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일하는 걸 잘 보신 면장님은 나에게 시청에서 공공근로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계속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하셨다. 나는 곧 공공근로 자리에 지원했고 합격해서 9개월 동안 일을 했다. 그러다 시청 국장님 비서 공무직 공고가 났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같은 팀에 일하던 주사님 한 분이 이런 공고가 났으니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냐며 공문을 뽑아 주셨다. 승무원 준비했었으니, 비서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꼭 지원해 보라고 하셨다.

사실 비서라는 직업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내 눈 깜빡임 때문에 과연 면접을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때도 나는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하고 있었는데 전보다 많이 호전은 됐지만 완치는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역시나 병명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감 전날 서류를 준비해 지원했다. 며칠 뒤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곧 면접 일정이 잡혔다. 나는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면접 준비를 했다. 그리고 면접 당일. 역시 나는 눈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면접관님께서 내게 눈을 자꾸 깜빡이는데 건조증이 심해서 그러냐고 질문하셨다. 나는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솔직히 말씀드렸다. 병명도 모르고 완치 방법도 없다고. 하지만 비서 일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그 면접에서 합격했고 그 뒤로 13년 동안 비서로 근무했다.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손님을 대하거나 민원인을 대할 때 나는 최대한 눈을 덜 깜빡이려고 노력했다. 13년 동안 비서로 일하면서 눈에 관한 질문을 받은 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적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내 노력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 병의 병명을 알아냈다. 상세 불명의 틱, 틱장애. 그것이 평생 나를 괴롭혀 온 이 병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시청 민원실에서 제 증명 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매일매일 민원인을 만나는 자리라 눈 깜빡임이 무척 신경 쓰였다. 어느 날은 민원인이 눈이 몹시 아프냐며 얼른 안과에 가보라고 한 적도 있고 자주 오시던 민원인분은 인공눈물 약을 사다 주신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감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퍼지기도 한다. 눈 때문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나는 평생을 이렇게 열심히 병원에 다니며 약도 꾸준히 먹지만 이병은 완치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항상 주눅 들고 슬프게 만들었다. 어릴 때 반장도 하고 남 앞에 나서길 좋아했던 내가 점차 남들 앞에 나서는 게 꺼려지게 되자 마음이 너무 무겁고 슬펐다. 특히 틱장애라는 병명이, 내가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라는 게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내 주변 아무도 나를 장애인 취급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틱장애는 솔직히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남들이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만큼 내가 치열하게 노력해 온 결과이다.

지난 4월에 나는 KBS의 우리말겨루기라는 프로에 참가했다. 공중파 텔레비전 프로 출연은 틱장애가 있는 나에게 무척 큰 도전이었다. 평소 그 프로를 즐겨보고 참가해 보고 싶었던 나는 예심을 보러 가는 그 길에서도 이 도전이 맞나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심과 면접에 합격하고 방송 출연이 결정되면서 틱장애에 관해 이야기했고 제작진은 그런 건 출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나는 주눅이 들어 구겨졌던 마음을 활짝 펴고 녹화에 임했고, 내 출연 회차에서 우승했다. 방송에서 나의 눈은 쉴 틈 없이 깜빡여 보기 싫었지만, 방송을 본 내 주변 수많은 사람 중에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말 겨루기 도전 이후 나는 자신감을 되찾았고 이제 틱장애는 나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제 내 나이 마흔둘, 40년을 넘게 싸워온 틱장애와는 아직도 오랜 세월을 함께해야 한다. 제약 기술이 발달해 완치가 가능한 약이 나오지 않는 한 아마 약도 평생 먹어야 할 것이다. 치명적인 단점을 피하려고 치열한 삶을 살아오게 만든 이 장애는 앞으로도 나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가게 만들 원동력이 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 틱장애를 피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이 장애와 함께 남은 인생을 즐겁게 잘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전에 친구가 해주었던 말처럼 남들보다 눈을 더 자주 깜빡이는 만큼 더 빠르게 세상을 보며 앞으로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오늘도 내 눈은 쉴 틈 없이 깜빡인다.



*2024년 공직문학상 수필부문 금상을 받았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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