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살아온 서른 하나의 갈증

시작하는 글쓰기, 그 이유

by 호시절


벌써 한 해도 두어 달이 지나갔다. 아니, 한 해의 일부를 떠나보냈다. 지난해,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그 길목에서 담담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실은 담담한 척했다. 자꾸 빛바랜 생각들을 입에 머금고 있었기에, 앞자리가 바뀌는 해거름을 보면서 퍽 씁쓸해했다. 서른에서 서른 하나로 넘어오는 언덕은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그저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의례적인 행사를 치루듯 '대체로' 즐거웠지만 때때로 생채기가 났던 나의 모습들을 복기해보았다.

어릴 적부터 인정 욕구가 있었다. 그만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개의 평범한 아이들이 그렇듯이 '공부'였다. 공부만큼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한정된 시간 내에서 그런 욕구는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특별히 좋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여 노력밖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었다. 남들이 대체로 선망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권유에, 판단이 미숙했던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생의 행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겠고, 혹은 '남들도 다 그래'라고 힐난조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에게 지나온 선택들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나 역시 인간이기에 매 순간 아쉬움들로 가득했다. 이러한 아쉬움은 분명 '대체로', 그냥저냥 살아온 탓이었을까. 그 중심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자명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이 좋다는 일을 갖고, '대체로' 사람들이 좋다는 시기에 결혼을 하여 안정권의 궤도에 진입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는 구축되지 않고, 자꾸 경계가 모호해지는 '나'의 모습이 표류할 뿐이었다. 한참 일과 사랑의 서툼에서 비롯된 슬픔에 허덕이고 있었던 언젠가,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산뜻하다. ‘면도날’을 읽은 후 이런 느낌이 들었다. 소설이 가볍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현실과 이상을 다루는 소설들은 간혹 마음에 묵직함과 우울감을 남기곤 한다. 이상에 도달할 수 없어 결국에는 비극으로 당도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이상은 이상일뿐이야’라며 자기 위안을 하곤 했다. 적어도 내가 접한 소설들은 그랬다. ‘면도날’에서도 역시 다소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래리의 모습은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래리의 모습에서 모종의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 느낌은 소설의 말미에까지 지속된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현실에 몸담고 있는 정착민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였다면, 래리는 노마드적 삶을 통해 실존적인 물음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래리는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만남, 침묵하고 있었던 언어 혹은 사유의 발견을 통해 깨달음으로 점차 나아간다. 이러한 래리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착민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현실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이 산뜻한 이유는 래리, 이사벨, 엘리엇, 소피, 수잔 등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그들 입장에서 혹은 그것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충분을 넘어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때문에 작가가 이들의 삶 모두가 ‘일종의 성공담’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삶이 하나의 큰 여정이라면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와 ‘어떤 경험을 하는가’의 두 가지에 따라 나아가는 길이 계속해서 수정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택’과 ‘경험’은 서로 맞물리는 작용을 한다. 래리의 삶에서 전환점의 역할을 하였던 경험은 ‘죽음’이라는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였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의 죽음을 근접 거리에서 경험한 래리는 내면의 물음을 해결하고자 노마드적 삶을 그야말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다시 래리에게 여러 가지 ‘경험’들을 가져다주었고, 그 ‘경험’들을 통해 래리는 다시 현실 속으로 들어오기를 ‘선택’한다. 래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제껏 어떤 ‘경험’을 하였으며, 이 ‘경험’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끔 하였는지 곱씹어 보게 되었다.

다소 긴 분량에도 술술 읽히던 면도날을 덮고 나서 귀결되는 한 가지는 이제까지 삶에 대해 고민할 때 떠올렸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당위적 물음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체적인 물음이었다.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에는 아직도 어렵지만, 책을 읽는 동안 삶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아, 과연 이 소설은 나에게 짙은 여운을 남겼다. 삶을 잘 살았다는 기준에 모종의 도덕적 기준이 물론 작용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삶의 중심에 내가 바로 서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 '대체로' 살아온 내가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것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은 이제 오롯한 나의 몫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글을 쓰면서 정련해나가고자 한다. 작고 큰 것들. 관찰을 통해 내가 느낀 것들. 간직해왔던 기억의 단편들, 바로 그것들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