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초록 지붕집의 소녀

by 글똥

만 삼천 원의 행복. 넷플릭스의 시간.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독서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앤 정주행이라고 했다. 어릴 때 만화로 본 게 전부였던 빨간 머리 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고 불렀던 그 앤을 드라마로 본다고. 너무 재밌어서 앤의 팬이 되어 버렸다고.


일 년 뒤, 내가 그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 삼일의 행복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퇴근하자마자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오롯이 앤을 만났다. 집에만 오면 나도 모르게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 앉는다. 그렇게 앤을 보았다. 그리고 친구에게 나도 너처럼 빨간 머리 앤의 팬이 되었다고 톡을 넣었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동포 1리 281번지가 내가 나고 자란 주소다. 나의 부모님은 참외 농사, 벼농사를 지었다. 추억을 들추어 보니 앤이 살았던 애번리와 비슷한 동네였다. 앤의 친구, 앤과 함께 살았던 마릴라와 매튜,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 길버트...


나는 어른이 된 앤의 현실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길버트와 결혼해서 소설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길버트는 의사가 되어 다시 애번리로 와서 살고 있지 않을까. 캐나다에 있다는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설레발친다. 심장이 쿵쾅거릴 만큼 앤에게 빠져버렸다. 이게 정상이라고 할 만큼 몽고메리의 앤은 특별하다.


플리마켓에 참여하는 선배에게 전화했다. 얼마 전, 그녀의 집에서 앤의 그림이 그려진 수제컵을 보았다. 학교 가는 앤, 춤추는 앤, 소풍 가는 앤, 독서하는 앤의 그림이 그려진 컵이었다. 그 잔에 커피를 내려 마셨다. 앤의 모든 시간을 보고 나니 그녀의 스토리를 소유하고 싶어졌다. 다음 장에 나를 위해 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오십을 넘은 나이에 소녀처럼 마음이 달뜬다. 얼마 전 숲에서 얼음 썰매를 탈 때도 그랬다. 육십을 넘은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모두 하하 호호 웃으며 열심히 얼음 썰매를 탔다. 저마다 어린 시절의 놀이를 추억하며 소년과 소녀로 돌아갔다. 마치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얼음 위에서 우리는 한 동네의 언니 오빠가 되어 즐거운 수다를 즐겼다. 날은 무척 추웠지만,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지고 몰캉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작은 연못에 얼음 썰매를 갖다 놓은 이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만들어 주던 스케이트가 생각나서 나무를 구해다 기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느 늦은 오후에 나는 그분을 만났다. 연세는 좀 있으셨으나 얼굴은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웃고 계셨다. 기다란 송곳이 박힌 막대기를 양손에 쥐고 얼음 썰매 위에 두 발을 얹고는 신나게 연못을 가로질렀다. 서서 썰매를 타려면 균형 잡기가 꽤 힘들 텐데 선수처럼 달렸다. 나는 뒤에서 우와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동심이 주는 선물은 나이를 막론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날 우리는 모두가 앤이었고, 길버트였다.


다시, 겨울숲을 걷는다. 숨은지(池)의 썩은 나무 둥치 갈래길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안녕?' 하며 나타날 것 같은 상상에 잠시 걸음을 멈춰도 본다. 영화 속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지는 이곳에서 나는 오늘 맘껏 앤이 되고 싶다.


옷장에서 빨간 원피스를 꺼냈다. 누빔이라 무척 따뜻하다. 오늘은 이 옷을 입고 종일 앤처럼 보내고 싶다. 오십을 살면서 아직도 서툰 관계에서 헤매고 있지만, 밥벌이에서 팍팍해진 나의 모습에 자주 지치기도 하지만, 희망과 기쁨이 사라진 것 같은 순간에도 내가 묵묵히 버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기분, 이런 순간이 삶의 빈 틈을 넉넉히 채워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