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인간

김동식, 요다

by 글똥

회색 인간, 참 매력적인 제목이다. 두 어장을 넘기니 매슬로우가 떠오른다. 원초적 본능 앞에 이성을 잃어버린 그들을 보며 탈북민들로부터 들은 북한의 굶주린 이웃들도 생각났다. 사람은 누구나 회색 인간이 될 수 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이성은 아주 추악하게 마비된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중 생존은 가장 넓은 밑바닥을 차지한다. 지저 인간들이 살 땅을 파기 위해 납치되어 온 만 명의 지상 사람들에게 식욕 그 이상의 욕구는 존재하지 않는 회색 인간. 화가도, 노래하는 사람도 모두 맞아 죽는 곳. 지저 인간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각각 어떤 인간인가.


10대의 죽기 살기 공부, 20대의 죽기 살기 취업, 30대의 죽기 살기 직장, 40대의 죽기 살기 일, 50대의 죽기 살기 부조, 60대의 죽기 살기 병원, 70대의 죽기 살기 운동 그리고... 진짜 죽음. 한평생 우리들의 삶은 회색투성이 아닌가 싶다. 자아실현의 꼭대기 욕구를 이루기 위해 현재의 기쁨을 기꺼이 포기하고 삶의 즐거움도 당연히 미래로 던져버린 모습이 지금의 나는 아닌가. 나는 지금 회색 인간화 되어 가는 중은 아닌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래하는 한 여인을 통해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삶을 벗어난다. 그녀로 말미암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던 이와 소설가에게 각자의 능력을 기억할 것을 사람들은 허락한다. 비로소 그들의 이성은 정상이 된다.


그녀는 왜 뺌을 맞고, 돌에 맞으면서까지 노래하였을까. 주어지 곡괭이로 땅을 파던 어느 날, 지금의 삶에 대한 물음표와 느낌표가 끊임없이 그녀의 뇌를 두드렸을 것이다. 나의 유일한 생존 수단인 곡괭이를 씹어 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삶의 수레바퀴. 우리도 회색 인간의 삶을 살다 문득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 같은. 은행원의 안락한 직장 생활을 버리고 타히티섬으로 들어가 배고픈 화가의 길을 굳이 걸어간 한 남자의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노예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의 많은 가장과 아내와 청년과 학생과 어린이들도 대체로 회색 인간이다. 오늘도 나는 퇴근길의 엘리베이터에서 회색의 인간들을 만났다.


감사하게도 나는 가끔 어쭙잖은 글을 끄적이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독서를 하고 생각을 나누며 삶의 이유를 하나 찾는다. '문학의 힘'은 때로 '밥의 힘'을 능가한다. 회색 인간은 그것을 말해 준다. 뜨개에 빠져 몇 달을 쉰 독서와 글쓰기의 시간이 푸른빛으로 녹슬어 있을 때, 나는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 아마도 그때 나의 얼굴은 회색이었을 것이다. 간절하였던 숲에서 심신을 풀어헤치고 난 후 나는 자판 위에서 꽤 오래 글수다를 떨었다. 문학의 물꼬가 트인 그때의 희열이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무엇인지 안다면, 힘들어도 그 여인처럼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회색 인간은 우리가 노래를 멈추는 순간, 나의 그림자보다 먼저 내 발 끝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불편한 현실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동지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내가 이 책을 부지런히 읽고 쓰면서 어느 한 날을 기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