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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Jun 24. 2024

젖다

드디어 비가 온다. 습한 바람과 싱싱한 바람이 메들리처럼 불어온다. 얼른 베란다에 캠핑 의자를 펼쳤다. 창살 같은 방충망도 활짝 젖히고 오롯이 민낯의 세상과 마주한다. 기다렸다는 듯 거센 바람이 들이친다. 얇고 가는 망 사이에 걸려 미처 들어오지 못했던 바람이다. 몸 빨간 블루투스를 켜니 내 작은 카페에 음악이 가득하다. 축축한 공기, 어두운 밤, 먼 불빛들이 어우러져 내 안의 허기를 채운다. 발 끝에서부터 시작한 빗방울들이 심관을 타고 빠르게 나를 점령한다.


봄비와 여름비 사이에 건조한 날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사막을 걷는 것처럼 갈증이 인다. 몸과 마음이 이유 없이 메마른다. 소금물을 들이켠 듯 갈수록 심해지는 자연의 갈증 앞에 나는 매번 무기력하다. 요즘 들어 더욱 자주 이상 반응을 감지한다. 그럴 때마다 마른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래도록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야속할 때도 있다. 동남풍도 서북풍도 없는 시간, 나는 시름시름 시간을 앓는다. 뿌리내린 나무이거나 꽃을 피우려는 망울처럼 하염없이 세상이 젖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갈수록 수동적인 내 삶의 방식은 더욱 고착화된다. 애를 써 보나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활발하고 진취적으로 본다. 사실 나는 겁도 많고 그다지 사교적이지도 않다. 그러려고 무척 노력할 뿐이다. 어울려 지내기보다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거나 홀로 산책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무리 지어 관광하기보다 홀로 고요한 바다를 찾아 거닐다 오는 것을 좋아한다. 아쉽게도 나는 장거리 운전을 못 한다. 고속도로 운전이 두려워 한 시간 거리의 친정도 갈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숱한 사람들에게 이제 변명하는 것도 지친다. 그냥 이런 나를 인정해 주고 한 번쯤 나를 데리고 바다나 산으로 데려가 주면 좋겠다.


홀로 바다를 찾는 친구가 있다. 그녀도 나만큼 비를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 뜬금없이 연락이 올 때가 있다. 늦은 저녁이어도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덥석 그녀와 동행한다. 그리고 밤바다를 본다. 파도 소리를 듣는다. 검은빛 바다는 나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 짙다. 바다 앞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치면서도 나는 파도와 춤을 춘다. 쿵작작쿵작작 쿵작작쿵작작. 들어왔다가 나가는 파도의 쉼 없는 리듬에 몸을 맡긴다. 비듬 같은 삶의 찌꺼기들이 파도를 따라 바다로 가는 것을 본다. 바다에 마음을 씻고 오면 '맑을 청'과 '느릿느릿'이 오래 내 곁에 머문다.


주말이 지나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되면 쳇바퀴 같은 삶에 자꾸 속도가 붙는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지만 점점 빨라져 헉헉거리며 달리게 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사용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내게 아마추어다. 그 이유를 나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덜컥 탈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어리석은 인생에 내 이름 석 자가 당당한 세월을 살았다. 자주 비를 바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 비는 그런 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다. 고장 난 브레이크로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나를 멈추게 하는 강력한 메시지다. 빗소리에, 비 내리는 풍경 속에 나만의 제동 장치가 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상이 비에 갇혀 수동태가 된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모두 자연의 수동태다. 하늘과 땅과 공기, 햇빛 심지어 물까지. 우리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의 선물을 누리며 살 때 가장 아름다운 내가 만들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젖기로 한다. 몸도 마음도 몽땅 오늘의 비에 젖어 온전히 수동태가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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