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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앤 Jun 20. 2022

영혼의 기상

갑분 신앙고백


페이스북을 한지 11년이나 되었다. 

2011년 3월 15일에 사진과 함께 첫 개시글을 올렸다. 

그때는 대학생이었고, 3학년 과정 후 휴학 1년을 하고 마지막 남은 1년을 다시 시작하는 시기였다.  

하나씩 내가 기록한 글들과 사진을 보는데, 11년 전이라 해도 전혀 낯설지 않고 그때의 감정과 생각들이 또렷이 기억이 났다.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는 똑같은 나니까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11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닌데, 또 대학생과 애 둘을 키우는 아줌마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그럼에도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는 그냥 나였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11년 전의 20대의 나는 나의 영혼과 나의 감정에 더 충실하고 진지했다는 점이다.


/


  나이를 한살한살 먹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고, 

나의 가능성을 실험하면서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일에 몰두를 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바래왔던 나의 모습이다. 그렇게 살아가는게 맞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적인 모습에 좀더 치우쳐지면서, 내 영혼을 좀더 가꾸고 돌보는 일에 소홀히 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20대에도 저질체력이라는 별명이 있던 나였다. 

그때보다 10년이나 지난 지금은 아무리 건강을 신경쓴다고 해도, 그때 버티던 것 보다 더 힘들어졌다.  

외부 활동은 더 많아졌으나, 체력은 한계적이다보니 쉼과 운동에 대한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그러나 나의 영혼과 정신을 신경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귀찮은 일이 되었다. 외부 환경과 나의 육체에 신경쓰는 일도 버거운데, 나의 영혼을 돌보는 시간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치부해버렸다. 

교회 예배도 의무감이 더 큰 상태로 드리게 되었고, 아침에 일찍 드리는 예배는 졸음과 사투하며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유치부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나의 특성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으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참 가식적인 선생님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주일에 여전히 졸림상태와 피곤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침대위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이 침대 위에서 헤롱거리는 모습으로 드리는 나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겠나 하는 죄책감이 내 안에서 꿈틀대었다. 

겨우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열었다.





누가복음 12장 54 - 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바리새인들에게 꾸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상하게 묘한 통쾌한 기분이 든다. 절대자가 누군가를 혼내는 모습에서 그 사람이 나는 아니다라는 전제를 깔고.  


그러나 '천지의 기상은 분간 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사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풀어가실지 궁금한 마음에 겨우 정신을 차려서 말씀을 들었다. 



하아...


말씀을 들을 수록...  나를 두고 하시는 송곳에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씀을 들으며 뭔가 아픈 구석을 꾹 눌러 찌르는 듯한 통증은 참으로 당황스러우면서도 거시기 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내가 아니라고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 영혼의 기상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 



나의 영혼의 기상은 무엇인가. 

흐림? 가뭄? 미세먼지많음? 

나의 영혼의 기상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영혼이 탁하면 결국 나라는 인간은 탁해질 수 밖에 없어진다. 


행복한가? 평온한가? 감사하고 있는가? 

나의 행동과 감정은 어떠한가. 







11년전의 나는 나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정말 많이 몰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때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물음표가 많았고, 혼란 스러웠던 만큼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때만큼 영혼을 돌보며 탐구하는 하루를 보내지는 못하지만, 그때만큼 나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나의 주님 품으로 안겨서 그분이 나에게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을 듣고싶다.  바리새인에게 외식하는 자여라고 혼을 내주셨던 것 처럼 나를 혼내주셨으니, 이제 내가 잘못했다고 염치없이 고백하고 다시 부모의 품으로 안기는 것 처럼. 


나는 부모님께 혼이 나고 다시 부모님 품에 안긴 기억은 좀 처럼 없으나, 내가 우리 아이들을 혼내주고 다시 품에 안아주었을 때 그 마음으로 주님도 나를 사랑으로 안아주시지 않을까... 하고 그 마음을 짐작해볼 뿐이지만. 


항상 착한 아이이고 싶지만, 사실 나는 그런 아이는 못되는 것 같다. 언제쯤 착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아이들도 늘 부모를 속 썩이니..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철들고 멋진 큰 딸이 되어있을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일까?ㅎ



음... 혼나면서 잘 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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