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노트> - 스나다 마미 감독
오늘 할 일, 새해 목표, 또는 10년 후 나의 모습.
우리는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려 한다. 허기진 나날들을 풍족하게 채워 줄 것만 같은 미래를 새삼스럽게 꿈꿔 보는 것. 계획하고 소망하는 일은 일그러진 욕구를 잠시나마 바로잡아 주면서 주어진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계획을 지켜가는 건 나중의 스스로에게 맡겨 두면 되고, 계획을 세워 찬란한 미래의 달콤함을 맛보는 건 지금 당장의 내 역할이다. 순수한 이 만족감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계획을 만들어 가도록 부추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설레고 만족스럽다는 이유 덕분에.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죽기 전 꼭 해 봐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일컫는데, 앞서 말한 계획이란 영역에 있어 가장 집약적이고도 비상한 목표다. 사실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단어는 알고 보면 다소 섬뜩한 유래를 지니고 있다. 교수형이 집행될 때, 사람의 목이 줄에 팽팽히 매달릴 수 있도록 그 사람이 서서 받치고 있던 양동이(Bucket)를 걷어차 버린다는 숙어 ‘kick the bucket’에서 파생된 말이다. 버킷리스트는 그래서 죽음과 아주 가까이하고 있다. 죽기 전에 끝마쳐야 할 일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계획보다도 마감기한에 대한 압박은 처절하고 무겁다. 계획은 그저 가볍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는 그렇게 간단하게 여겨질 일은 아닌 이유다.
버킷리스트를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알아보던 중, 유난히 두드러지는 공통점이 바로 ‘죽음’이었다. 작품을 찾아보기 이전에, 아직 살아갈 시간이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조차 버킷리스트는 가볍게 허용되는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작품 속에서의 버킷리스트는 대부분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을 위하고 있었다. 물론 누구나 버킷리스트를 쓸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죽음과 가까이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초조하고 무척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임을 조금씩 알게 된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한 해 목표를 점검하고, 또다시 새로운 새해 계획을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계획’을 좀 더 무겁게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한 날들이 아닐까 싶어, 며칠 간의 감상문들은 ‘버킷리스트’를 담기로 한다.
[버킷리스트] 감상문 리스트
- <엔딩노트 エンディングノ-ト> - 스나다 마미 영화
- <플라멩코 추는 남자> - 허태연 소설
- <열두 살 샘 Ways to Live Forever > - 구스타보 론 영화
감독 | 스나다 마미
제작 연도 | 2011 년
사실 더 자주 집착을 해 볼 줄 아는 놈이면 싶다. 사람이 축 늘어나 보이진 않을 테니까, 집착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아끼는 방법 하나쯤은 지니고 살아간다며 회유는 되니까 말이다. 집착이란 덕목은 움직임이 있다. 잠시라도 꿈쩍 못하는 발랑거림조차 미묘한 생기를 띤다. 삶을 움직이고, 움직이는 삶이 다시 나를 채우고 밀어 간다. 집착, 또는 욕심, 욕구, 욕망, 소망이란 이름들의 바퀴는 수레 위의 무거운 삶을 가뿐히 태워 움직인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그 수레는 어떨까. 멈춰있는 수레, 닳고 힘없는 수레가 떠오른다. 낡은 짐수레의 상처투성이 바퀴는 올곧은 ‘원’다움을 잃었다. 집착과 욕심의 대상이 없는 것일까. 닳아져 결국 아주 조심히 굴러가는 바퀴가 짊어진 수레의 무게는 지나온 삶의 시간들의 축적된 양, 그간 쌓아온 무거운 짐이자 경험의 산물이다. 짐이 가벼운 수레의 바퀴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더욱 빠르게 가는 것에 집착한다면, 힘없는 바퀴들은 무거운 짐을 사뿐히 내려놓기 위한 준비를 하기에 여념이 없을 뿐이다. 삶을 내려놓는 준비, 내려놓는 것에 대한 집착. 소중한 경험의 짐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멈춤을 가다듬는 것이다.
영화 <엔딩 노트>의 위암 말기 환자 주인공, 스나다 도모아키는 삶의 마지막을 정성껏 정리 정돈하면서, 오래 끌어온 수레를 조금씩 멈추어 본다.
죽음 앞에서도 때론 집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해 주면서.
카메라 부품 제조업체의 영업직으로서 오랜 시간 발로 뛰고 고개를 숙여 가며 많은 성과를 일궈낸 그다. 일생은 열정으로 범벅. 결과적으로 회사에서 높은 위치까지 올라서며 후배 직원들의 신임을 아우르는 성공한 삶을 닦아 온다. 그리고 세월은 온전히 그를 맞아들인다. 세월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암이라는 불청객이 그의 가슴속을 어질러 놓고 있음을 귀띔해 준다. 암을 받아들이는 스나다 도모아키는 무덤덤하다. 일그러진 기색 하나 없이, 암은 그저 또 다른 업무의 연속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옛 열정을 다시 불러와 볼 심산이다. 다만, 암 치료가 아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내 가족을 위한 일들을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대한 고민을 해 볼 작정이다. 이렇게, 그의 열정은 죽음 앞에서 다시 발한다.
그는 무척 꼼꼼한 성격이다. 마지막에는 무엇을 하고 떠나야 할지를 고민한다. 죽음을 변명으로 삼아 그간의 뜀박질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되려, 자신의 죽음과 죽음의 환경을 연구하고 미연에 모든 것을 살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죽음을 앞두고 해야 할 리스트를 적는다. 죽음을 앞둔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해야 할 일, 가족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마지막 정리. 스나다 도모아키는 힘든 일 없이 자신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끝까지 가족들을 달래고 위로하고자 한다. 그렇게 빈틈없이 파악한 할 일들을 10가지로 요약해 낸다.
1.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2. 손녀들 머슴 노릇 실컷 해주기
3.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4. 꼼꼼하게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
5. 소홀했던 가족과 행복한 여행
6. 빈틈이 없는지 장례식장 사전 답사하기
7. 손녀들과 한번 더 힘껏 놀기
8. 나를 닮아 꼼꼼한 아들에게 인수인계
9. 이왕 믿은 신에게 세례 받기
10.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자
그의 엔딩 노트에 적힌 리스트다. 어려운 건 없어도, 일생을 바삐 살아온 그가 일찍이 못해 아쉬운 내용들일 테다. 자신과 가족 사이의 관계를 짚는 일들, 그가 열정의 삶 그 끝에서 비로소 찾고자 했던 건 그런 관계적 안정감이다. 그중, 그가 신을 믿어 보려는 일은 꽤나 참신하다. 종교에 의지해서 천국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다급해진 것은 아니다. 죽음을 기도하고 정리하는 종교적 의례를 통해 조금이라도 가족이 안정적인 장례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그에게 신이란 가족을 보살펴 주실 수 있는 구원자다. 본인이 아닌 가족을 구원할 구원자. 타지에 있는 아들 내외와 손녀딸들에게도 마지막 안부 인사를 건네고자 하는 스나다 도모아키는 그렇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엔딩 노트를 작성한다.
미사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구세주라고 믿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합니다.
미사는 그 만찬을 기념하는 겁니다.
그 미사 중에 그리스도는 유품을 남깁니다.
우리들도 무언가를 남기죠. 물품이든 말이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무언가 남기고 가는 거죠.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는 자기 생명을 남기고 갑니다.
그게 최후의 만찬입니다.
온통 가족을 위한 일들로 마지막 임무를 작성한 건, 그간 챙겨 주지 못한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도모아키는 줄곧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을 내비치곤 한다.
언뜻 보면 평온해 보이지만 제 암이 발견된 후부터 뭔가에 화가 난 사람 같습니다. 딸한테 들은 얘기로 추측해 보면 일이네 접대네 하며 만날 집을 비우다가 이제 좀 같이 있을 수 있나 했는데 암에 걸려 죽는다니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후회의 감정은 온전히 그의 다짐으로 드러난다. 가족들에게 이미 해 주었어야 할 일들을 그제야 엔딩 노트에 옮긴다. 가족들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도모아키 자신의 진심을 다시 고백할 수 있는 기회의 목록들을 적는다. ‘10.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자.’ 그의 마지막 버킷리스트다. 영화 말미에서 아내 스나다 준코에게 ‘사랑해’라는 쉽고도 어려운 한마디를 진심을 다해 들려준다. 아마 본 필름이 남겨 둔 가장 슬프고도 의미 있는 기록이 될 부분이라고 감히 짐작한다.
못다 한 가족들을 위한 일. 스나다 도모아키의 마지막 집착은 이것이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다정한 집착은 주변 가족에게 편안하고 성공적인 기운으로 갈무리가 된다. 죽는 때가 가까워지면 가장 크게 밀려오는 감정이 안정과 후회라고들 한다. 삶의 끝에서 도모아키는 후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며 그 일을 안정적으로 마무리짓겠다는 계획을 내보인다. 솔직한 용서와 정돈된 계획은 그가 맞이하는 죽음의 모습을 결코 공허하지 않도록 만든다. 누군가를 위하겠다는 시작점과 행동으로 보여 주는 끝맺음으로 이어진 ‘엔딩노트’를 삶의 마지막 곁에 두는 것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사실상 어려운 일일텐데, 그 행동주의적 욕구가 무척 고상하다. 도모아키의 집착은 끝까지 아름답다.
암에 걸린 도모아키를 시종일관 관찰하는 건 막내딸, 스나다 마미의 역할이다. 딸은 아버지의 내적 다짐을 자신의 목소리로 덮어내고자 한다. 아버지 도모아키가 마지막으로 주변을 정리 정돈하는 모습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먼 훗날 아버지를 그리워할 자신과 남은 가족들의 바람을 대신한다. 엔딩노트 하나하나 적어 실천하는 아버지의 귀엽고 듬직한 일상은 딸에겐 슬픔이자 원동력이다. 남은 가족에게 최대한 해가 되려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변함없이 고마워할 수 있도록 당신의 입장과 태도를 그대로 답습해 보려는 것이다. 그녀의 내레이션은 아버지가 엔딩 노트에 담아내려 했던 가족애에 대한 케케묵지 않은 화답 방식이다.
스나다 도모아키는 마지막으로 병상에 입원한 지 6일째 되는 날 숨을 거둔다. 엔딩 노트에서 시작해 직접 그가 밝혀놓은 정리된 내용대로 장례 절차는 마무리된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죽마고우 분들과 추모 미사를 진행해주실 신부님을 장례식에 모신다. 꼼꼼한 아버지이자 남편 덕분에 그를 보내는 영결식 현장은 한결 질서 정연하다.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그를 떠나보내는 준비마저 조용하고 침착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