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일곱 시, 드디어 하나의 과업을 털어냈다. 이틀 연속 스터디카페 출근, 거기다 1박 2일간의 교육청 숙박 출장도 병행했다. 아참 오늘 아침 학교 자습 감독을 빼놓을 수 없지! 정말,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약 2주간의 시간을 소요한 큰 과업을 털었음에도 마냥 기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오롯이 '내' 과업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과업이기 때문이다. 정책연구, 거기다 향후 논문으로까지 발전 가능한 연구인데 수당까지. NO하기엔 아까운 기회였다. 사실 프레쉬박사에게는 이러한 기회 하나 하나가 다 귀하다. 연구직을 간접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교육청의 1박 2일간의 출장도 마찬가지. 그간 동경해왔던 미래학교의 장학사님, 선생님들을 만난다. 이 학교를 처음 본 것이 2019년일까? 그저 멀리서 연예인처럼 멋있다고 생각했던 선생님들과 함께 집필 작업을 한다. 누구에게나 쉽게 오지 않는 기회, 나에게 과분한 기회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NO를 외치면 행운처럼 찾아온 기회가 또 날아가기 쉽다는 것 또한 역시나 잘 알고 있다.
이 출장이 기대되었던 것은 언젠가 꼭 한번 뵙고 싶었던 교수님이 연구 책임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이다. 알고 보니 대학교 선배. 스치면 얼마든지 스칠 수 있었던 수많은 경우의 수의 교집합임에도 불구하고 실물로 뵙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이동 시간에 단 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 교사에서 교수로, 연구직으로 전환한 커리어와 그 여정, 그리고 지금의 상태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You should have said NO
당장의 시간 강사 기회가 귀해보이지만 별 것 아니다. 줄여라
논문, 논문, 논문이 중요하다. 나머지의 역량을 최대한 아껴라
선생님의 연구에 서사가 있어야 한다(닥치는대로 X)
SSCI 논문을 써야 한다
이 조언이 귀하게 들렸던 이유는, 당장 이직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아, 물론 반은 맞을 수 있다. 교사이지만 거주지가 불안정한 나의 미래를 고려하면 정말로 이직을 진지하게 시도해야 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직의 경로를 십수년째 고민해 본 입장에서, 그리고 그간의 경험에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계획한 대로 된 적이 없었다. 기회는 늘 우연히, 생각지도 않은 경로와 시간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 우연한 결정이 삶의 결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이에 무엇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은 진작에 버렸다. 그저 오늘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언을 새겨듣고 기록하게 된 이유는 지난주 교수님과께서 해주신 말씀 때문이다. 우연히 공부하는 필드의 탑저널 에디터로 한국인이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국인 교수님은 우리 교수님과 논문을 공저하시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인연으로? 나이대도 학교도 겹치지 않는데? 하며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 여쭤보니 교수님이 깜짝 놀라시며 그분의 이야기를 풀어주신다. 외국인, 거기다 아시안으로서 전 세계 탑 빅가이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이너 써클에 들어가신 분. 그 중 마음에 박히는 말씀이 있다.
김샘. 그런데 있잖아, 나중에 허무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생각 뿐만 아니라 그분이 직접 그러시더라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안다. 교수님은 인생에서 풀고 싶은 핵심 문제를 정하셨다고 했다. 교수님의 모든 연구와 저술은 그 문제를 향해 있다. 눈에 보이는 실적, 개수, 프로젝트에 연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당연, 그럴 필요가 없으시기도 하다). 과연 나는 어떨까?
지금 내 나이는 서른 일곱. 지금의 하루 하루가 귀하다. 체력은 하루 하루 소진되고 있고 오늘이 내 생애에서 가장 젊은 날임을 안다. 컴퓨터 앞에 보낸 이틀이 나중에 어떻게 기억될까? 혹,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던 그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 않을까?
어제 밤의 경험을 떠올려본다. 홍대 스터디카페에서 공간이 주는 감흥에 취해 종일 보낸 시간 자체도 너무나 설레였지만 또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공부가 마친 후의 맛집탐방이었다. 부러 올 일이 없는 홍대, 연남동, 서교동의 맛집은 얼마나 대단할까? 밤 여덟시, 스터디 카페가 문을 닫은 후 네이버 지도를 켠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한 십여분을 걸었을까? 첫 번째 후보 집에 왔다. 아쉽게도,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다. 패스. 두 번째 끌리는 집을 간다. 무슨무슨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피자집. 라스트오더는 8시 30분이라니 맞출 수 있을 것.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주방 마감이라고 한다. 세번째, 네번째 집을 가다 더이상 헤매다간 이마저도 못 먹겠다는 직감이 와 눈 앞에 떡볶이 집을 들어간다. 다,먹을 수 있는 때와 시간이 있음에도 놓쳤다.
지금의 인생의 맛집들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더 나아가, 지금 꼭 먹고 싶었던 맛집이 있는지 고민한다. 사실 이번달에 매진하고 싶었던 것은 한 공모전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제작년 수업에서 1등하는 사람이 오마카세를 먹자며 서로 공약했던 그 공모전. 실제로 멤버 중 한 분의 선생님은 1등을 해서 500만원의 상금을 타고 진짜로 오마카세를 쏘셨다. 그 시기에 나는 공모전이 아닌 박사논문에 매진해야 했고 내년에는 꼭 도전하리라 했다. 그리고 그 마감은 이틀 남았고 나는 손도 대지 못했다.
다짐한다. 진짜로 먹고 싶은 맛집에 집중하기로. 이제부터 그 서사에 부합하지 않은 과업은 과감히 NO하기로. 소중한 나의 하루를 정말로 소중하게 여겨주기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1인 세신샵을 예약했다. 홍대에 오니 이런 재미도 있다. 남은 시간은 공모전 글을 써 볼 요령이다. 지금 당장 맛집에 성공하지 못하면 어때, 일단 줄이라도 서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