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표류기>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 두 영화는 히키코모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일 거라고 자부한다. 왜냐면 나는 이 두 영화를 50번도 넘게 봤으니까. 김씨 표류기에서 여자 김씨는 가장 모범적인 히키코모리의 모습으로 지낸다. 아침 아홉 시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통조림 옥수수 캔과 생라면도 먹고 좁은 공간에서 제자리걸음 만보 운동까지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달 사진 찍기라는 건전한 취미 생활도 있다. 고성능 카메라로 바깥세상을 구경하다 표류한 남자 김씨를 발견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존재의 이유를 알기 위해 하얀 맨을 없애고 할머니에게 틀니를 찾아주려는 영군의 이야기이다. 그 안에서 정신병동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십억만 볼트의 핵폭발이라는 분명한 존재의 목적과 슬픔도 동정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싸이보그라니 영군이 부러웠다. 나는 괴로운 날이면 왓챠 파티로 두 영화를 틀어놓고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마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마치 내가 영화를 만들기라도 한 것 마냥 잘도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매번 아는 장면이어도 좋았다. 너무 지루한 날에는 여자 김씨가 있는 힘껏 달려 남자 김씨와 버스에서 만나는 장면과 영군과 일순이 정전기적 긴장으로 하늘을 나는 장면만이라도 꼭 챙겨봤다.
“그래 맞아 인생은 단 하나. 단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어 그렇고말고”
여자 김씨에게는 남자 김씨가 있었고 남자 김씨에게는 짜파게티가 있었다. 영군과 일순에게는 십억 볼트 존재의 목적이 있었다. 그러면 살 수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찾기만 한다면, 단 하나의 이유를 찾으면 앞으로 쭈욱 살 수 있으니깐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학교 미디어실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란 영화를 봤다. 학생들이 다 있는데 야한 장면이 나와서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복수를 꿈꿨는가.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복수를 성공시켰는가. 그리고 깨달았다. '그래 복수는 나의 힘이지 그렇고말고. 김씨의 짜파게티가 나에게는 ‘복수’구나. 나는 복수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손가락 마디마디 몸 구석구석 기운이 넘치는 거 같았다. 먼저 리스트가 필요했다.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전화해서 당당히 촌지를 요구하던 그 선생님을, 다른 아이들에게는 일반 펜으로 편지를 써주고 나에게는 네 본색을 안다며 굵은 싸인펜으로 몇 자 적은 종이를 건넸던 담임 선생님을, 내가 아끼던 운동화를 소각장에 버린 반 아이들을, 그런 옷 입으면 좋은 디자이너는 못 된다고 부모님 직업을 묻던 교수를,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라고 괜히 아는 척 안 해도 된다고 말했던 팀장을, 상병 때 헤어지자고 해놓고 다시 잡더니 결국 제대 후 또 헤어지자던 그놈에게 어떻게 복수를 해줄까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면 어김없이 생각하곤 했다.
나를 찬 남자들에게 보란 듯이 인터넷에서 일반인 얼짱 남자의 사진을 퍼와서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고 '너무 행복하다~ 오늘부터 1일♡' 같은 상태 메시지를 적기도 했다. 이런 유치하고도 극악무도한 짓도 나름의 복수라고 믿었으니 부끄러운지도 몰랐다. 자기로 인해 내가 완전히 망가져서 죄책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사실 있다. 될 수만 있다면 화끈하게 망하고 싶었다. 되도록 확실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모자나 마스크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CCTV를 미리 확인한 뒤 집에 똥을 투척하는 상상도 해봤고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길게 써서 달달달 외우기도 했다. 얼마나 그들을 더 비참하고 아프게 할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했다. 교수 보란 듯이 좋은 작업을 해서 나중에 학교에 특강으로 초대하면 정중하고 멋지게 거절하는 연습을 수십 번을 더 했다. 어떤 상상은 너무나 생생해서 나중에는 그 사람에게 미안해져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복수라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당한 만큼의 아픔을 주어야지 덜 아프게도 더 아프게도 줄 수 없으니 더욱 신중해야 한다. 1대 1 맞춤 복수라는 건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영역이다. 복수가 이렇게 힘들다니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함께 복수에 동참하는 게 진짜 사랑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친구1: 복수하고 싶은데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친구2: 복수해 본 적 있어요?
나: 저 복수 전문가예요!
글쓰기 모임 친구들은 나에게 복수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간 해왔던 머릿속 수많은 복수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동안 계획했던 복수의 횟수로 따지면 나는 복수 전문가가 맞다. 그리고 조금 미안해졌다. 내 상상이 소리로 들렸다면 이 착하고 선한 사람들은 나에게 치를 떨겠구나. 내가 얼마나 추잡한 인간인지 몰라서 다행이다. 머릿속 상상이 들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20대 바짝 날이 선 복수의 칼날도 시간이 지나니 무뎌진다. 그토록 미워한 사람들의 얼굴도 이제는 흐릿하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었겠구나. 그리고 또 나도 그 사람을 참 아프게 했구나.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다.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도 용서할 수 없던 나 자신도 이제는 덜 밉다. 그럼 나는 이제 뭘 위해 살아야 하나. 그동안 복수의 힘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정말 어쩐다. 내 인생의 짜파게티를 찾아서 삶을 표류하는 중에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밥 먹고 씩씩하게 사는 거야"
-영군과 일순의 태도는 말 안 됨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 같다.
우리가 망상이라고 깔보면서 불러도 분열증 환자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생활의 기반이다. 어쨌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니까. 내가 핵폭탄이라고 믿어야 이 여자가 잘살 수 있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터지면 너희들은 다 끝장이야라는 마음으로 살더라도, 남들에게만 해끼치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다.
-착각과 착란이 대체로 박찬욱 영화에서 이끄는 지점은 어떤 이성적 판단이 고장나버리는 지점이라는 거다. 늘 영화에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판단이 멈춰지는 것이 항상 중요하게 보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굉장히 원초적인 내용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방금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게 바로 그런 내용이다. 무지개가 떠오르고, 해도 뜨고, 둘이서 원초적인 나체로 끌어안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밖에는 생존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제스처도 들어 있다. 세상을 끝장내겠다는 목적을 자각하고 나서야 존재하겠다는 희망을 갖는 그런 패러독스가 보기에 따라서는 불행하거나 뭔가 보수적인 태도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뿌리를 뽑아버릴 정도의 완벽한 희망을 포기한, 그런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존재의 목적을 거창하게 외부에서 찾는 것은 어렵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존재의 목적은 존재 그 자체이고, 뭔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밥먹고 씩씩하게 그냥 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욕먹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뭐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런 거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박찬욱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