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누군가를 계속 기다렸다. "사실 너는 지구 사람이 아니야. 원래 네 고향 행성에 진짜 가족들이 있으니까 얼른 짐 싸! 당장 떠나자"라고 말해줄 그런 어른을 나는 계속 기다렸다. 어떤 물건을 챙겨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미리 짐가방 같은 것을 싸놓거나 언제 내가 사라질지 모르니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둘까도 생각했었다. 어느 날 내가 없어져서 놀랄 지구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괜스레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내가 사라지면 후회할 거면서'같은 말을 습관처럼 자주 했다. 그 사람을 기다릴 때면, 그러면 난 견딜 수 있었다. 어떤 순간은 그래야만 견딜 수 있기도 했다. 끝날 거 같지 않던 엄마 아빠의 싸움도,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도.
아무리 기다려도 그 어른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를 믿으라며 이 모든 건 이제 끝이라고, 괴로웠던 기억을 다 지워줄, 나를 구원해 줄 어른. 길거리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맞는 걸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나에게 주먹을 날리는 아버지를 말려줄 그 사람을 찾느라 나는 맞으면서도 많이 아픈지도 몰랐다. 그 사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내게 올지 모르니 나는 더 유심히 사람들을 살펴봐야 했다. "사람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못써" 엄마는 말했지만 혹시 날 찾아왔는데도 못 알아볼까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인생에서 몇 번씩 그 사람이 왔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모습을 한 수많은 사람을 사랑했다. 사랑을 해야만 버틸 수 있던 나날들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듯이 나 또한 그랬다. 정신을 쏙 빼놓는 사랑. 당장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내팽개치고 새벽 바다를 보러 기차를 타는 무모하고 바보 같은 철없는 사랑, 내 수치스러운 과거도 심지어 나조차도 잊게 하는 사랑, 이 사람이 아니면 살 수 없을 거라고 살아있는 내내 불행할 거라고 장담했지만 하나같이 모두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기다렸던 어른.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랑한다고 수십 번도 더 말하고 그 수많은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지금은 이름도 목소리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더 이상 그 어른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알았다.
어린 시절 나를 구원해 줄,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그 어른은 바로 나. 지금의 나. 그 모든 순간 내가 그렇게 곁에 있어주길 바라고 함께 도망치길 바라던 사람. 한심하고 시시하고 나 자신도 용서하지 못할 선택을 했을 때 말없이 밥을 차려 먹이고 이부자리를 펴줄 사람. 망신스럽고 쪽팔리고 어디다 말할 수도 없이 부끄러운 짓을 했을 때 고함치지 않고 무섭지는 않았냐며 말을 건넬 사람.
나는 그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렸구나. 무서워도 비겁해도 찌질해도 그렇게 행복하지도 그렇게 불행하지 않아도 그래도 살아가는 나를. 그토록 기다렸던 내가 찾던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