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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an 05. 2018

우리동네 정씨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그가 태어난 곳은 이북 함흥이라고 한다.

태어난지 얼마 못 되어 부모님을 폐병으로 잃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숙부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다.


그가 수염도 나기 전에 전쟁이 난다.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 피난길에 숙부 가족과 헤어진 것도 모자라 동상으로 발가락 한 개를 잃는다.

여기저기 피난을 떠돌다보니 춘천이었다.

캠프 페이지 앞 양키시장에서 물건 배달일을 시작한다.

가게 주인이 마침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미국 노래라 제목도 모르고 뜻도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노래들이 좋았다.


그 가게가 잘 되나 싶더니 주인이 미제 물건을 팔다 걸려 잡혀 들어가고

갈 곳이 없어진 틈에 마침 댐을 짓는다는 소식에 트럭 조수로 취직을 한다.

소양댐 공사가 끝나자 그동안 모든 돈으로 중고 트럭을 한대 사서 용달을 시작한다.

오줌 마려운 것도 참아가며 트럭 운전을 해서 돈이 좀 모이는가 싶었는데 그만

비오는 날 차가 미끄러져 포장마차를 덮치고 마침 그곳에 있던 손님들이 다친다.

병원비를 물어주고 경찰서를 드나드느라 수족같은 트럭을 판다.


며칠을 누워 술타령을 하는데 TV에서 광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본다.

당장 끼니라도 때워야하는 상황이라 할 수 없이 광산으로 간다.

처음엔 막장 광부로, 몇 년 지나서는 지하 설비 운영자로, 

또 몇 년 지나서는 지상 설비 운영자로 직급이 바뀌던 중 장가도 든다.

고된 일이었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내 집까지 마련하는 보람에 힘든 줄을 모르던 어느 날,

그가 작동하던 기계에 발목이 끼는 사고가 난다.

기계가 멈추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꺼내 병원으로 옮겼지만,

으스러진 다리는 영영 다시 붙일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팝송을 들으면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광산에서 일할 수 없게 된 그에게 가구 공장을 하던 고향 친구가 동업을 제안해 온다.

공장은 자기가 운영할 테니 사무실에서 공동 대표를 맡아 영업관리를 하는 대신 투자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몸 쓰는 일 하다 발목까지 잃었으니 이제부터는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며 살고 싶은 마음에 선뜻 응한다.

하지만 머잖아 친구가 고의로 부도를 내고 잠적하면서 그가 빚을 떠안게 된다.

남은 돈을 털어 빚잔치를 하고 감옥에 다녀오는 동안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다.


감옥에서 나와 남의 집 농사 품팔이를 시작한다.

그렇게 몇 년을 옥시기 밥에 간장만 먹으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 산 밑 마을에 밭을 사고 사과 농사를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자식 넷을 키워 시집 장가를 보낸다.

그리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는다.

안 그래도 일이 지겨워 밭에 고꾸라져 죽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병을 얻었으니

이 참에 남에게 도지(임대) 주고 쉬어야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땅게처럼 밭에 붙어산다.

팔십을 넘긴 그에게 이제라도 땅 팔아 좋은 집 짓고 편히 살라고들 하지만

벌어먹고 사느라 자식들 크는 거 봐주지도 못했는데 이 땅이라도 안 남겨주면 자식들 어떻게 보겠느냐고 망설인다.


얼마 전 그의 아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라디오를 사 왔다.

전원만 켜면 자동으로 몇 천 곡의 뽕짝노래가 나오는 라디오였다.

지난 여름, 그의 집 근처 전봇대에 벼락이 떨어져 TV가 고장났다.

새 TV를 사던 날, 나는 그의 집에 가서 연결을 도와드렸다. 

그가 물었다. 이 라디오에 수지큐 노래좀 넣어 줄 수 있냐고.

그의 라디오에는 4기가짜리 메모리가 들어있었다.

수지큐 노래만 넣기엔 용량이 너무 크다고, 다른 노래 뭐 넣을까요, 그랬더니 그의 입에서 줄줄 나왔다.

그의 말대로 수지큐 뿐 아니라 탐존스, 롤링스톤즈, 닐 다이아몬드, 씨시알, 비지스, 호세펠리치아노도 넣어드렸다.

그날부터 그의 밭에는 거칠지만 흐느적거리는 60년대 팝송이 흘렀다.

그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대해 가끔 아는 척을 하면,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 게 뭘 알겠냐고 퉁을 준다.

아유, 저 레드제플린, 키쓰, 이글스도 알어유, 그러면 햐, 요고 봐라? 어디서 줏어 들은 들은 풍월은 있어가주구, 그러신다.



그가 라디오를 허리띠에 차고 시티100 오도바이로 동네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은 그더러 양키시장 배달부로 다시 취직했냐고 농을 건넨다.

그러면 히죽거리며 옛날 양키시장 무용담을 자랑한다.

지금은 캠프 페이지도 이사 가고 양키시장도 없어졌고, 오직 파킨슨병 남아 손을 떨지만, 그는 여전히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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