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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Sep 14. 2022

내가 쓸 수 없는 책

어떤 책을 쓰면 좋을까?






블로그에 글을 올리다 보면 가끔 글 청탁을 받곤 한다. 덕분에 이런 저런 주제로 글을 쓰게 된다. 청탁 받는 주제는 내 블로그 내용과 비슷한데 음악이나 교육 관련 글이다. 음악 관련 글은 주로 특정 작곡가나 음악, 음반에 대한 글인데 원고료는 적거나 없다.(가끔 음반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 쪽 글 청탁이 더 반가운 건 내가 좋아하는 분야라서일 테다.


그런데 아이들의 학교 이야기에 관한 책을 내면서 교육 관련 글 청탁이 늘었다.  경력이 얼마 안 되는 교사 대상으로 선배 교사의 비법을 전하는 글이거나 학부모 대상으로 육아에 도움이 되는 주제가 많다. 교사로 오래 먹고 살다 보니 어려운 글은 아니지만, 어떤 주제는 그렇지 않다. 어떤 건 며칠 끙끙대다가 겨우 쓰기도 하고, 끝내 못 쓰기도 한다.


4년 전, 두 번 째 책이 나왔을 무렵이었다. 첫 책은 얼떨떨하고 민망했는데 두 번 째라 그런가 창피한 마음은 줄어드는 대신 근거 없이 우쭐하던 때였다. 마침 어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저자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바로 응했고 며칠 뒤 기획안이 왔다. 


<소심한 아이를 대범한 아이로 바꾸는 엄마의 코칭법 7단계>


책 제목에서 뭔가 권위가 느껴졌다. 코칭법이라... 이 책을 읽는 부모님은 감독(저자)이 되어 선수(아이)를 '코칭'하겠지. 그 단계를 착착 밟아가면 아이는 저절로 대범한 아이가 되는... 이야기 같았다. 출판사에서도 그걸 의도했는지 큰 제목 7개와 그 아래 몇 개씩 달린 작은 제목에 대하여 설명을 써달라고 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내용이 잘 안 떠올랐다. 하지만 약속을 했으니 어떻게든 쓰고 싶었던 나는,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면 글의 뼈대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보내 온 주제를 수시로 보면서 생각에 들어갔다. 


'소심한 아이를 대범하게 바꾸는 엄마의 코칭법이라…. 엄마가 잘 코치하면 소심한 아이가 대범하게 된다는 말인데…. 근데 이게 가능할까? 근데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드는 건 뭐지? 소심함과 대범함은 서로 대척점에 있잖아. 전혀 다른 성격이라고. 아이들 가르치다보면 소심한 아이를 조금 덜 소심하게 바꾸는 것도 될까 말까인데 대범하게 바꾼다고? 그것도 교사가 아니라 엄마가? 아이가 과연 들으려 할까?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지, 아니야.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내가 못 가르쳐봤다고 해서 안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잖아? 세상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내가 그동안 가르쳤던 아이들 중 이 주제에 맞는 아이가 있나 떠올려보았다. 오래 전부터 써놓은 교실 일기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아이고, 나는 못 쓰겠다, 였다.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 저마다 지닌 기질이 있고 양육환경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소심한 아이는 소심한 기질을 기반으로 양육된다. 아이들의 양육환경은 문화권보다 다르지만 부모가 사랑과 헌신으로 키우는 건 비슷하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타고난 기질을 인정하고 장점을 발전시키도록 키운다. 아이의 타고난 품성을 무시하고 억눌러 다른 기질로 바꾸려고 하면 아이가 고통스럽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하라고 시킨다. 비현실적이며 성공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편집자에게 연락을 했다.



나 : 주제가 선뜻 와닿지 않는데... 아이의 기질을 바꾸는 게 가능할지 확신이 안 선다. 주제가 좀 황당하다 싶은데. 이런 내용의 책이 과연 성공할까 의문이다.


출판사 : 의외로 잘 팔린다. 그리고 성공 여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니 일단 써보자.


나 : 글쎄... 엄마가 아이의 기질을 바꿀 수 있다는 건 환상이다. 난 못 쓰겠다.


출 : 상담한다는 기분으로 쓰면 될 것 아닌가? 아이가 소심한데 대범하게 바꾸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학부모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나 : 실제로 내가 상담할 때는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타고난 기질의 장점을 살려주라고 답하는 편이라...


출 : 그럴 때 학부모 반응은 어떠한가? 담임이 딱 부러지는 해법을 말하기를 기대하고 상담 왔을 텐데 바꿀 수 없다는 답을 들으면 다들 실망할 것 같은데.


나 : 하지만 아이를 바꾸는 건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


출 : 모든 교사들이 다 그렇게 답하진 않을 것 같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쓸 수는 있지 않은가?


나 : 그렇긴 하겠지만... 성공 사례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드물거나 장기적으로 아이는 다시 원래로 돌아갈 것이다.


출 : 어떤 학부모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 성공할 수도 있지 않겠나?


나 : 너무 어려운 예를 누구나 가능할 것처럼 쓰면 지나친 일반화가 될 수 있다. 정말 아이가 바뀔 거라 생각하는 학부모가 이 책을 읽는다고 가정해보자. 아이는 상처 받고 부모는 자괴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책은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출 : 그런 희망 고문이라도 얻고 싶어 하는 학부모가 많다. 아이에게 집중하려는 요즘 학부모들에게 잘 통할 것이다.


나 : 차라리 솔직하게 소심한 아이가 대범하게 바뀌는 경우는 없으니 소심한 아이는 소심하게 키우되 장점을 찾아보라는 주제로 책을 만들면 어떤가? 그런 건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출 : 아쉽지만, 학부모들은 그런 책을 사지 않는다. 대신 아이 교육에 관해 짧고 간단하게 딱 떨어지는 해답을 제시하는 책을 산다.


나 : 교사로 살아보니 아이를 키우는 일에 짧고 간단하며 딱 떨어지는 해답은 존재하지 않더라. 아이는 시간의 힘으로 자란다. 작은 것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몇 달, 몇 년이 걸리는 게 양육인데.


출 : 나도 인정하지만, 요즘 육아서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나 : 이런 책이 학부모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이 양육에 대해 그릇된 신념을 만들까 봐 걱정이다. 아무리 판매가 목적이라지만, 자극적인 주제로 희망을 강요하는 책을 만들면 안 될 것 같다.


출 :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독자는 이 책을 읽고 자기 아이에게 적용하거나 또는 버릴 것이다. 그것이면 된다. 이번 책은 한 두 달이면 쓸 수 있다. 우리가 목차와 소주제 내용도 다 잡아줄 테니 작가님은 쓰기만 하면 된다. 내용이 걱정되면 최대한 성공 가능성 높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되지 않겠나?


나 : 왠지 육아용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이 든다. 읽는 사람은 많지만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는 자기계발서.


출 : 그래도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꾸준히 산다. 팔리니까 자꾸 만드는 거고. 판단은 독자가 하니까 우리가 너무 윤리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육아용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


나 : 나 자신도 회의적인 주제로 책을 쓰는 게 독자를 속이는 것 같아 불편하다. 


출 : 그럼 다른 주제는 어떤가? 기획안을 더 보낼 테니 읽어보고 알려달라. 주 저자가 곤란할 경우 우리가 다른 교사를 초빙할 테니 공저자로 참석해도 된다.


추가로 받은 기획안


- 공부 번아웃에 걸린 아이 공부 동력을 되살리는 12가지 위로 비법

- 부끄럼 많은 아이, 발표 천재 만드는 비법 10가지

- 전교회장 출마하려는 아이에게 엄마가 주는 리더십 조언 10가지


주제만 달랐지 비현실적이거나 희망 고문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공부에 지친 아이(얼마나 많이 했으면 벌써 지쳤을까)를 다시 공부하게 하라고? 지친 아이는 스스로 일어날 힘이 생길 때까지 쉬게 해주는 게 먼저다. 또 공부에 지친 아이를 위한 위로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공부에 지친 아이에겐 위로가 아니라 휴식이 먼저다. 공부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참아야 했던 게 많은 아이라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어야 하고 힘들어서 지친 아이에겐 아이 수준에 맞는 공부법을 다시 짜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서  먼저 아이에게 사과부터 해야 한다. 아이가 공부 때문에 지쳐가도록 방치한 사람이 누군가? 교사와 학부모가 아닌가? 그렇다면 주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공부에 지친 내 아이에게 사과합니다>


발표 천재도 같은 이유로 비현실적이다. 부끄러움은 타고나는데 이런 아이를 등 떠밀어 발표시키면 어떻게 될까. 보나 마나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부끄럼이 많다는 건 섬세하다는 것이고 신중하다는 의미도 된다. 섬세한 만큼 관찰력이 좋고 신중한 만큼 깊이 생각할 테니 글도 잘 쓰겠지. 학습 계획을 세우거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것도 잘할 것이다. 이런 걸 타고났다면 굳이 바꿀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기뻐하고 축하해줄 일이다.







이런 책(자기계발서)이 얼마나 잘 팔리면 출판사마다 비슷한 주제를 기획할까. 주제를 보고 있으면 마치 조물주의 손을 보는 느낌이 든다. 책 대로라면 뭐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기 전에는 저 책대로 꼭 하고야 말 것 같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 책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결국 성공하고 싶어 자기 계발서를 선택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과제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책. 그 책으로 성공한 사람은 단 하나. 만든 사람 뿐일지도 몰라.


   






노력만 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테니 두려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라거나 나약한 자신을 깨부수고 나아가라거나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식의 희망 협박(?) 책들이 비단 우리나라에만 넘치는 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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