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책상 속을 거칠게 뒤지더니 그림 일기장을 꺼내 책상 위에 탁, 소리나게 놓는다.
바로 이어 굳은 표정으로 필통을 열더니 연필을 꺼내 일기장에 휙휙, 신경질적으로 그린다.
잠시 후, 일기를 다 썼는지 앞으로 나오더니 내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놓고 들어간다. 여전히 굳은 표정이다.
그러자 한 아이가 내 눈치를 살피며 그 아이를 나무란다.
"야, 너 왜 일기장 막 던져. 그러다 선생님 맞으면 어쩔라고!"
"야, 넌 상관 쓰지(신경 쓰지)마. 내가 그럴 일이 있으니깐 그렇지!"
"야, 그렇다고 막 던지냐? 으이구, (나를 보며) 선생님, 다칠 뻔 하셨죠?"
"아니, 나야 뭐..."
내가 우물우물 하니까 답답했는지 나에게도 타박을 한다.
"헐. 선생님이 맨날 오냐오냐하니깐 애들이 막 던지죠. 으이구, 속 터져."
나는 두 아이의 눈치를 보며 아이의 일기장을 펼친다.
넓은 그림 일기장에 등장하는 사람은 달랑 두 명.
색도 안 칠한데다 졸라맨으로 그렸지만,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눈과 입은 제대로 표현한 걸 보면 대충 그린 건 아니다.
키 크고 화난 사람과 울고 있는 한 사람.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평소 가지런하던 글씨도 오늘은 좀 수상하다. 날짜를 쓴 숫자도 거칠고 비 온 날씨를 표현하는 연필선도 신경질적이다.
그림 속 이들이 누군지, 뭘 하는 내용인 지 이것 만으로는 알 수 없다.
나는 아이를 다시 불러 그림 내용을 물어가며 아이가 평온했다면 알아서 썼을 설명을 써넣어 준다.
키 큰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석.영. 이렇게 끊어서 말한다.
석영이는 아이의 큰 언니다.
5학 년인 석영이는 막냇동생인 이 아이를 무척 예뻐해서 복도나 급식실에서 만나면 좋아 난리다.
친절한 언니 덕분에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평소엔 꼭 큰언니라고 부르며 애교를 피우는 아이가
오늘은 언니라는 호칭도 빼고, 그것도 이름을 또박또박.
평소 일기장 가득 재미있는 그림으로 채우던 아이였는데.
그 사정은 오른쪽의 내용을 보니 알 것 같다.
아이를 쳐다보니 일러바치듯 말한다.
이석영이 제 목을 쫄랐어요, 엄청 쎄게.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끼어든다.
"야, 너 왜 까불어? 이석영이라 그러지 말구 석영이 언니라 그래야지."
그러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지른다.
이제부터 언니 아니거든. 이석영이야. 내 목을 봐!
내 목 엄청 쎄게 쫄랐단 말야!
사실 조른 흔적은 안 보이지만 난 일부러 큰 목소리로 놀라는 척한다. 아이고, 니네 언니가 니 목을 졸랐어?
그러자 아이들이 모여든다. 나는 계속 아이 편에서 거든다. 와, 그럼 너 엄청 아팠겠네. 석영이 언니, 안 되겠는걸. 선생님이 혼내 줘야겠는데?
네. 혼내 주세요. 아이도 화가 많이 났는지 적극 나선다. 선생님이 석영이 언니 어떻게 혼내줄까? 가서 막 때려줄까? 아니면 언니가 너한테 한 것처럼 목을 쫄라 줄까. 엄청 쎄게! 내가 손으로 목을 조르는 흉내까지 내며 유난을 떨자 아이는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더니 아까보다는 덜 화 난 말투로 혼내주세요. 말로만요, 그런다. 하지만 곧, 너무 봐줬다 생각하는지 또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이 때리고 싶으면 쬐끔 때려도 돼요.
쉬는 시간.
아이들이 내게 와서 묻는다. 선생님, 석영이 누나 때리러 진짜로 5학년 교실에 지금 가실 거예요?
난 여전히 화나 있는 척 말한다. 아니지. 쉬는 시간은 너무 짧으니까 이따 시간 많을 때 가야지. 동생 목을 쫄랐잖아. 엄청 혼내줘야지. 아이들이 수군거린다. 헐. 인제 석영이 누나 죽었다. 그 사이 어떤 아이가 쓰윽 교실을 나간다. 아마 석영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러 갔을 것이다.
점심시간.
급식실에서 밥 먹고 있는 석영이가 보인다.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고 있고, 아이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선생님, 저기 이.석.영. 있어요. 지금 혼내주세요. 난 여전히 화나 있는 척 말한다. 아니지, 급식실은 너무 좁아. 밥 먹고, 석영이 언니가 운동장에 나가면 내가 따라나가서 혼내줄 거야. 동생 목을 쫄랐으니 엄청 혼나야지. 암!
그 사이, 석영이 누나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쪼르르 가서 또 상황을 알려 준다.
점심을 먹고 아이의 손을 잡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잘 봐, 선생님이 석영이 언니 엄청 혼내 줄게. 하지만 막상 내가 신발을 신고 막 운동장으로 내려서는 순간, 아이가 말한다. 선생님, 때리지는 말고요. 목도 조르지 마요. 그냥 말로만 혼내 주세요. 난 멈칫하며 말한다. 어, 그럴까? 너 목 엄청 아프게 졸랐잖아. 아이는 말리는 표정으로 말한다.
대신 저도 언니한테 돼지, 바보라고 썼으니깐요.
그 사이, 또 몇몇 아이가 이 상황을 알리러 쪼르르 달려간다. 나는 석영이에게 가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덧붙인다. 네 동생이 언니 엄청 좋아하나 봐.
아이는 가끔 화가 나면 제 언니의 이름을 막 불러댄다. 그 순간은 언니라고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호의적이지 않아서 막내가 돼 가지고 언니 말을 안 듣고 바락바락 대든다고 엄마 아빠에게 야단을 자주 맞나보다.
비 오면 우산도 씌워주고 친구랑 다툴 때 자기를 편 들어줄 땐 참 좋은 언닌데,
왜 가끔 발로 차고 목을 조르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마음 내키는대로 언니를 대하고 싶지만 힘으로나 머리로나 상대가 안 되다보니
언니에게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일기장을 선택했나보다.
일기장에 언니에 대한 서운함을 털어놓는 것으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일기를 대충 쓰고 넘어갈까를 궁리하는데, 저 아이는 그림 일기를 그릴 때 제법 진지하다.
자존감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비록 소심하지만, 일기장에 털어놓는 것으로 마음을 지켜내려 애쓴다.
겨우 1학년 아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지금은 언니와의 일을 털어놓지만, 앞으로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친구 문제를,
공부 문제를, 직장, 결혼, 육아문제를 털어놓는 친구로 일기장은 쓰일 것이다.
저 아이의 그림 일기장에 빽빽하게 기록된 삶에는 단단히 여며진 자존감이 가득하다.
결국 저 아이를 키우고 있는 건 언니와 일기장인 셈이다.
*
아이는 지금도 가끔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언니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막 대든다.
언니는 막냇동생의 반항을 대체로 참고 봐준다.
그러다 화가 나면 한 팔로 동생의 목을 감싸 학교 뒤로 질질 끌고가 야단을 친다.
하지만 평소엔 아이가 놀이터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간 가방을 챙겨 가기도 하고
아이가 아파 학교에 못 오는 날이면 내게 와서 수줍은 표정으로 동생이 아파서 학교에 못 와요, 이런다.
5학년이면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도 어린 나이인데, 야무지게 동생까지 챙기는 모습이 대견해서 아이구, 넌 참 좋은 언니구나. 칭찬을 해 주면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웃는다.
그렇게 좋은 언니 덕분에 막내 동생은 요즘 투정과 눈물이 많이 줄었다.
언니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보다 자기가 언니에게 대들고 고집부리는 일이 더 많다는 걸 막내인 저 아이는 끝내 모르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언니에게 투덜거리고, 때로 사랑받으며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언니를 둔 저 아이의 복일 것이다.
부모와 달리 자매들은 서로의 세밀한 생활을 알고 있다.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가기 때문에 정작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건 자매들이다.
자매들끼리는 나이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대체로 공유하는 환경과 문화가 같아서 부모가 모르는 부분을 자매가 많이 채워 줄 수 있다.
아이의 언니는 아이의 부모가 지나치는 부분을 세심하게 채워준다.
아이의 부모 역시 큰 딸이 보모 역할을 할 수 있게 지원과 힘을 실어준다.
세상의 모든 맏이가 동생들에 대한 짐을 어깨에 메고 살아가듯 모든 막내들에겐 막내의 축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