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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zi Aug 12. 2024

008. 배움이 무색하다

큰일 났다. 내일 아침이면 버스로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검색을 해보니 이때 공항에서 준 PDI라는 종이쪽지가 있어야 한단다. 어렴 풋이 지난 숙소에서 짐 정리를 하다가 흔한 영수증이겠거니 싶어 쓰레기통에 버린 기억이 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짐을 모두 엎어 은행 번호표처럼 생긴 얇은 조각을 찾아 한참을 헤맸다. 없다. 이게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벌금 정도면 다행이다. 그것보다 더 큰일이면 어떡하지? 검색도 잘 안된다. 몇몇 블로그에 다시 수도로 가거나, 지역에 있는 어느 관공서에서 재발급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있는 것 같다. 하필 수도에서 제일 멀리 와있고, 버스는 아침 7시 버슨데. 비행기며 숙소며 모두 예약이 끝났는데. 혼자 감당하기 벅차고 겁이 나 속이 들끓는 사이, 저 앞에 메카를 향해 오늘의 마지막 기도를 하는 무슬림 여행자가 있다. 쟤한테 좀 물어볼까? 기도가 끝나고 긴 전화통화를 하더니 눈웃음을 슬쩍 비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 벌써 밤 12시가 넘었구나. 하지만 난 자리에 남아 부족한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로 정보를 계속 검색한다. 그러다 새벽에 살짝 취기가 올라온, 덥수룩한 턱수염을 가진 여행자가 들어왔다. 그 시간 불안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걸 느꼈는지, 안 자고 뭐 하냐, 무슨 일이냐? 고 물어준다. 그 질문이 너무 고맙다. 울먹울먹 상황을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듣고 그가 한 말이다.


‘야, 고작 그것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이러고 있냐? 그거 그냥 종이 쪼가리다. 걱정할 것 하나 없다.
나도 예전에 멕시코에서 잊어버린 적 있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자, 지금 네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짐을 싸고, 마음 편히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예약한 버스를 타라. 내일 예정된 그 시간에 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해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자라.
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냐? ¿Para qué sufrir?’


설명을 마친 그는, ‘이제 됐지?’ 하고는 쿨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소심한 나는 잠을 설쳤고, 새벽에 숙소 문을 나선 후에도 서류 분실을 해결하러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우물쭈물했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버스를 탔고, 국경에 도착했다. 출국-입국 심사 줄을 서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직원이 돌아다니며 PDI 있냐고 물어본다. 잃어버렸어요, 하니 저쪽으로 줄을 다르게 서라고 하는데, 어쩌다 젊은 남자 배낭객들 몇 명과 같은 상황에 묶여버렸다. 이후 나는… 간단한 서류 하나를 써서 제출하고, 아무 문제 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비행기에 올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 오랜 친구를 만나 저녁으로 밀라네사를 먹었다. 물론 공문서이니 상황에 따라 전개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전날 밤과 새벽, 그리고 당일 아침까지의 약 12시간을 고통으로 낭비했다. 한참 뒤 이 경험을 상담사와 나눈 적이 있다. 상담사가 말했다.


 ‘아지 씨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던 건 결국 무엇 때문이었나요?’
‘네? PDI죠.’
‘잘 생각해 봐요. 그 종이를 어디에다가 넣었어요?
잊지 말아요. 결국 Trash였다는 것을’.  





... 그러나 경험이 준 교훈이 무색하게도, 나는 요즘도 스스로 버린 휴지 파편들을 또다시 애타게 찾아 헤매며 긴장과 고달픔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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