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도토리.
(밀렸던 이야기들)
여느 때처럼 신나게 치앙마이를 휘젓고 돌아온 저녁.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한 맨션 직원이 달려왔다.
-유! 체크아웃! 투데이!
(너 오늘 체크아웃하는 날이야!)
처음엔 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나에게 그녀는 내처
-유! 유! 체크아웃! 유!
하며 화난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맨션에 들어온 날짜가 6월 8일.
애초에 두 달을 계약했으니 나가는 날은 8월 8일 아닌가.
갑자기 왜 이러지?
-난 8월 8일이 나가는 날이예요.
그러자 그녀가 살짝 수그러 들더니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평소엔 수줍은 듯 빙그레 웃고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시장을 봐오던
얌전한 그녀가 화를 내니 한편으론 서운했다.
바로 오늘 아침만 해도 서로 다정히 인사를 주고받았건만...
바로 그때.
어디선가 40대로 보이는 작은 키에 앙칼지게 생긴 인상의 여자가 후다닥 뛰어나오더니
-체크아웃 체크아웃!!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맨션의 여사장이었다.
그녀는 장부를 가져와 내게 보여 줬는데 그곳엔 내 체크인 날짜가 6월 6일로 되어 있었다.
순간 정신이 후루룩 쏟아져 내리더니 나 또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수증!
처음 계약할 때 받았던 영수증과 7월에 한 달분 낼 때 받았던 영수증!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가 영수증을 가져와 보여주니
마치 내가 조작이라도 했다는 듯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요모조모 계속 뜯어보더니 급기야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참의 실랑이가 오고 갔다.
한 10여분을 투닥투닥 대더니 그제야 한마디 사과 없이
다른 사람이 실수한 모양이다, 내일 나가라. 하는 것이다.
내일?
8월 8일이 아니고 내일?
이때쯤에는 이미 두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한참을 당한 뒤라
나 또한 이도 저도 아주 다 귀찮아졌다.
-그래. 내일 12시에 나가줄게.
하고는 씩씩대며 올라왔다.
아.
이게 내 집 없는 서러움이구나.
빚을 많이 지긴 했어도 내 나이 7살 때부터 부모님은 내 집 마련에 성공했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았던 그 집에서 나는 21년을 살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나가라 마라 하지 않았던 나의 집.
그 후엔 호주 게톤 카라반 파크에서 카라반을 빌려 살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렌트비를 칼같이 내고 가끔 한국인 관련 일들을 돕고 해서
주인은 무척이나 호의 적이었다.
어느 게스트하우스를 가도 나는 주인들과 썩 잘 지내는 편이었다.
사람들을 마구 불러 모아 술파티를 열거나 베란다에서 뻑뻑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그저 지켜진 선대로 꼬박꼬박 돈 내고 인사하고 서로 도우며 잘 지내왔는데
이런 내게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하던 사람들이
안면을 확 바꿔 마치 쓰레기 치우듯 내치려다가
자신들의 실수임이 밝혀졌는데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다니...
이런 뭐 같은 일이!!!
흥분해 있는 내게 속 좋은 우리 남자 친구님은 뭐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니?
하다가 나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 남자 친구가 옆에서 든든하게 버텨서 몇 마디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냥 올라가 버리면 어떡해?
아무리 일본인들이 서로 얼굴 붉히며 문제 생기는 걸 싫어한다는 거 나도 알지만
그래도 옆에서 남자가 든든하게 서서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하고는 영수증을 가져왔으면 내가 그렇게 둘러싸여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 아냐?
아주 흥흥흥! 분 해서 마구 쏘아댔더니 잠시 할말을 잃고는
미안하다고 그렇게 힘든 줄 몰랐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왜 8월 8일이 아니고 7일이냐고 묻는다.
그러게?
나도 이상해서 다시 셈해보니 이 여주인이 한 달을 30일로 계산한 모양이다.
아놔... 또 한 번 머리에 혈액이 다량 공급되면서
이 뭐냐.. 왜 이런 건 철저히 하는건데?
전기세도 딴 사람보다 더 받으면서!!
와이파이도 매번 로그인하게 만들면서!!
하면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화가 나서 미친 듯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보란 듯이 내일 나가주마 싶었다.
남자 친구는 인터넷을 켜고는 만화를 보기 시작하고
그런 남자 친구가 너무 얄미워져서(?) 당장 다른 맨션을 알아보자.
아니다 내일 당장 치앙 콩으로 떠나자.
아냐 아냐. 올드시티에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가자.
하며 볶아 대기 시작했다....
이 끓어오르는 화를 고스란히 가장 내편인 남자 친구에게 풀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그래도 지금 내 유일한 편인
모든 걸 받아주는 그에게 풀고 또 풀어 댔다.
오토바이로 싼티 땀 맨션을 돌아다니다 우리는 남자 친구가 평소 가고 싶어 했던
올드 시티 안의 '올디에 게스트하우스'에 가기로 했다.
내일 체크인하겠다고 약속까지 단단히 잡아 놓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다.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냥 불편한 장소일 뿐이다.
2달 동안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잘 살았는데
모든 게 새것에 방안에 에어컨, TV, 테이블도 2개에 큰 침대에 깨끗한 화장실과
도이쑤텝이 보이는 베란다에 그 옆 지붕으로 날아오던 비둘기며 작은 참새들까지.
모든 게 좋았던 이곳이 오늘 밤은 참으로 낯설게만 느껴졌다.
우리 불쌍한 남자 친구..
성격이 뭐 같은 나를 만나서 매일 고생이 심하다....
우리가 사다줬던 간식에 중독(?) 되어 매일 할퀴고 물며 졸라대던 맨션 개.
보고 싶엉.....ᅟᅲᅟ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