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세련된 방식

<완다비전> 속 완다의 트라우마가 묘사되는 방식에 대하여

by 송희운

※ <완다비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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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다비전>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지닌 캐릭터인 '완다'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풀어낸 드라마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스치듯이 다뤄졌던 '완다' 캐릭터의 이야기가 비로소 온전하게 설명되는 작품이라 그런지 최근에 감상했던 마블 작품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완다'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완다비전>의 1화는 시트콤 형식으로 시작한다. 이미 1화에서 이 시트콤 형식과 캐릭터가 갖고 있는 서사가 충돌한다는 느낌을 받는데, 완다가 바로 직전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타노스에게 잃고 홀로 남겨져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화에서 웨스트뷰로 이사 온 완다와 비전에게서는 이러한 비극의 징후를 눈치챌 수 없으며, 좌충우돌하면서도 행복해하는 이들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만 펼쳐진 것처럼 보인다. 이 행복해 보이는 시트콤 내에서 종종 분위기가 달라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 순간들은 실제 현실이 이 시트콤 내로 개입하는 순간들이다. 처음에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러한 순간들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 이면이 드러나면서 시트콤의 세계가 또 다른 평행 세계가 아닌 완다가 창조해낸 그만의 완벽한 세계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완다는 자신 밖에 있는 현실이 자신의 시트콤 내로 개입하려고 할 때마다 조작을 가해 자신이 애써 만들어놓은 환상을 더욱 공고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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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다의 이야기가 풀어질수록 완다가 창조한 세계가 그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와 얼마나 큰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고독하고 외로운 세계이며, 현실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위안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 무차별 폭격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고, 함께 살아난 쌍둥이 오빠도 갑작스럽게 사망하였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얻은 안식처인 사랑하는 연인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홀로 남은 고독이 <완다비전>의 세계를 창조해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가정을 이뤘으며 현실에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쌍둥이까지 낳아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시트콤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가족들과 함께 시트콤을 보던 시절, 비전과 함께 시트콤을 보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자, 그가 너무나 큰 상실의 고통으로 인해 현재를 계속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 연인을 잃은 완다의 트라우마는 사실 다른 이야기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완다비전>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감정만으로 캐릭터가 가진 트라우마를 풀어내지 않는다. 이 엄청난 트라우마를 시트콤이라는 희극 뒤에 배치함으로써 그가 가진 비극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어떤 면에서 이 트라우마에 대한 묘사는 인간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데,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지만 완다가 가질 수 없었던 행복한 삶을 환상 속에서나마 잠시 누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트라우마를 풀어내는 신선한 방식은 그동안 마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지 못했던 '완다'라는 캐릭터를 섬세한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여준다.


드라마 속에서 완다는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가진 강력한 힘은 오히려 그 칭호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갖고 있던 감정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했던 완다는 평온하게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들었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들러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화에서 완다는 자신의 힘을 모두 풀어 그들을 놓아주었지만, 그가 마을 중앙으로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눈길로 그를 '마녀'라고 낙인 짓고 있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히어로였던 그는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한순간에 빌런이 되어버린 것이다. <완다비전>에서 완다는 숨겨져 있던 자신의 진짜 힘을 깨달으며 '스칼렛 위치'로 각성하였지만, 그가 여전히 영웅인지 혹은 빌런이 될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엔딩에 이르러서 그는 자신이 환상으로 덮어 씌웠던 트라우마를 비로소 직면하였지만, 그 세계를 창조하게 만든 자신의 진짜 감정인 고독을 마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기에 양가적인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이 히어로가 앞으로 연결되는 영화 속에서 어떤 길을 걸어갈지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세련된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다룬 마블이 완다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해내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지, 혹은 여전히 그 트라우마 속에 살면서 더욱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보여줄지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