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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Sep 19. 2024

인생이라는 빈칸을 채워 나갈 때

<룩백> 단평

※ <룩백>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체인소맨] 만화로 잘 알려진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한 <룩백> 애니메이션이 지난 9월 5일 개봉하였다. 1시간이 살짝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이 작품은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현재 16만 명 관객을 돌파하였고, 추석 시즌이 지난 지금에도 흥행 순항 중에 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얼핏 보면 간단해 보인다. 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후지노는 매주 학보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같은 학교에 등교를 거부하고 있는 동급생 쿄모토가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한 주 학보에 만화를 싣게 해 준다. 쿄모토가 그린 만화가 실린 학보를 받아 든 후지노는 그의 엄청난 그림 실력을 보고 깜짝 놀란다. 주변 친구들로부터 쿄모토가 그림을 훨씬 더 잘 그린다는 평을 들은 후지노는 충격을 받고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림 실력에만 매달린다. 그러다 코모토가 다른 학보에 실은 그림을 보게 되고, 쿄모토와의 그림 실력 격차를 느낀 후지노는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후지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담임 선생님이 학보에 만화를 같이 연재했던 인연이 있으니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주라고 말하고, 우연히 쿄모토를 만나게 되면서 후지노와 쿄모토의 인생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실 <룩백>은 상당히 슬픈 이야기이다. 후지노와 쿄모토는 후지노가 졸업장을 갖다 준 계기로 서로 친구가 되어 후지노 쿄라는 콤비로 만화를 그리게 되고, 어린 나이에도 단편을 여러 편을 내면서 그 어떤 때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낸다. 하지만 쿄모토가 미술 대학에 진학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는데, 하필이면 이때 쿄모토가 학교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며 쿄모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 만화가로 데뷔하며 연재를 하고 있었던 후지노는 완전히 무너져버리면서 자신 때문에 쿄모토가 세상으로 나와 죽어버렸다고 절망한다. 


<룩백>이 캐릭터가 가진 슬픔을 어떻게 승화하는지 보여주는 방식은 참으로 '만화'적이다. 누구나 슬픈 일 앞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만약에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화적인 연출로 보여준다. 처음 후지노가 졸업장을 갖다 줄 때 그림을 잘 그리는 쿄모토를 질투하며 그렸던 후지노의 만화가 죽은 쿄모토의 집에서 우연히 발견되고, 후지노는 자신의 만화 때문에 히키코모리로 살았던 쿄모토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절망하면서 자신이 그렸던 네 컷 만화를 찢어버린다. 네 컷 만화의 가장 첫 번째 칸에 있던 대사인 "나오지 마!"라는 후지노의 마음은 '만약에'라는 시나리오 속에서 쿄모토의 방 문틈으로 살아있는 쿄모토에게 전달되어, 쿄모토는 그 대사처럼 후지노를 만나지 않고 미대로 진학한다. 미대에서 쿄모토가 작업 중 휴식을 취하려다가 어떤 괴한에게 공격을 당할 뻔하는데, 이때 후지노가 나타나 괴한에게서 쿄모토를 구해준다. '만약에'라는 시나리오의 미래에서 후지노는 만화 작가가 아니었지만, 쿄모토가 자신을 알아보자 과거 쿄모토에게 허세를 부리며 말했던 것처럼 이제 다시 만화를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후지노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한 쿄모토는 후지노가 그랬던 것처럼 네 컷 만화를 그리고 그 만화는 다시 쿄모토의 방 문틈으로 후지노에게 전달된다. 만약의 시나리오에서 살아있던 쿄모토가 그린 만화는 후지노가 위험에 빠진 쿄모토를 구해주는 내용이었으며, 그 엔딩은 띠용하는 만화적인 효과음과 함께 후지노의 등에 곡괭이가 익살스럽게 꽂혀있는 장면이었다. 이 만화를 보고 후지노는 쿄모토의 집을 떠나 잠시 펜을 놓았던 자신의 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룩백>은 끝이 난다.



쿄모토는 세상 밖으로 나와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지만, 쿄모토가 살아생전 겪었던 세상은 쿄모토가 혼자 갇혀 있는 세상에서는 절대 알 수 없던 것들이었다. 이는 후지노도 마찬가지였다. 후지노와 쿄모토는 서로 바라보고 있었던 시선은 달랐을지라도 거대한 울타리에서 하나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후지노에게는 그것이 '만화'라는 장르였고, 쿄모토에게는 '순수 미술'이라는 장르였을 뿐이다. 후지노의 집에서 콤비로 같이 그림을 그리던 시간은 서로가 함께 꿈을 꿀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서로를 행복하게 하고 더욱 자라나게 하였다. 비록 바라보고 있었던 곳이 달랐기에 잠깐 서로 멀어졌던 기간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였으며 그들이 함께 있었던 시간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만화적 상상력의 허용에 의해 살아있는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그려준 네 컷 만화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네 컷 만화의 그림체가 쿄모토가 평상시 그렸던 그림체와는 완전히 다르고 오히려 후지노의 그림체와 더 닮아 보이기에 그 만화는 후지노의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난 쿄모토 대신 자신이 힘을 내서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읽힐지도 모른다. <룩백>은 이러한 장면에 대해 해당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굳이 자신의 의도를 꺼내 설명하지 않는다. 그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어, 장면 해석에 대한 자율성으로 인해 이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이 장면은 기존의 원작 만화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더욱 아름답게 연출한 장면이기도 하다. 후지노와 쿄모토의 만화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살랑거리며 쿄모토의 방 문 사이를 오고 가는 이 장면은 '만약에'라는 시나리오와 합쳐져서 더욱 서정적이고 애틋하게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엔딩에서 자신이 평소에 앉아서 만화를 그리던 자리로 돌아와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뒷모습은 더 이상 쓸쓸하거나 슬픈 감정이 아니라 어떤 벅차오르는 감동을 준다. 그것은 자신의 만화를 계속 구매하면서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던 쿄모토에게 보내는 후지노의 헌사일 수도 있고, 쿄모토와 자신이 함께 만화를 그리던 추억을 되살리면서 앞으로 또 살아갈 힘을 얻는 후지노의 다짐일 수도 있다. 후지노에게 쿄모토의 죽음은 평생 동안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일 수도 있지만, 후지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자신의 꿈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룩백>의 엔딩은 마치 관객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채워나갈 인생의 수많은 빈칸을 당신은 어떻게 채워나갈 것이냐고.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인생의 빈칸을 어떻게 채워나갈까? 이 엔딩은 어떤 훈계나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인생으로 빈칸을 채워나갈지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 [체인소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작품 곳곳에 깨알같이 녹아들어 있는 [체인소맨] 요소들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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