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레그스> 단평
※ <롱레그스>의 엔딩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뜻밖의 흥행에 성공하며 네온이 창립한 이래 배급한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롱레그스>가 드디어 10월 30일 국내 개봉하였다. 국내 개봉하기 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가장 무서운 영화로 입소문이 나있었던 <롱레그스>가 개봉하자 호러 영화 팬으로서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롱레그스>는 기대했던 것보다 공포스러운 순간들이 적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난 완성도를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기존 배우의 얼굴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비주얼의 니콜라스 케이지와 더불어 공포에 쫓기는 이의 불안한 호흡을 뛰어나게 연기해 낸 마이카 먼로까지 영화 속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 속 모든 장면의 연출들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우러져 완성도 높은 공포 영화가 되었다.
<롱레그스>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이러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감을 갖고 있는 FBI 요원 리 하커는 30년간 계속된 일가족 연쇄 살인 사건에 새롭게 투입된다. 그동안 어떠한 진척도 없었던 사건에 리 하커가 투입된 이후 롱레그스가 살인 현장에 남기고 간 암호를 해독해 내면서 조금씩 범인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리 하커는 자신의 과거가 롱레그스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씩 그의 실체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롱레그스>는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그 이야기를 보여주는 힘도 뛰어났지만, 영화의 모든 장면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과 이 진실과 연결되는 엔딩이었다. <롱레그스>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롱레그스의 조력자는 사뭇 충격적이다. 하커의 어머니는 롱레그스라는 살인마로부터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악마의 길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커의 어머니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롱레그스의 살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들은 바로 하커 가족과 캐리였다. 외면상으로 캐리는 롱레그스가 살인 행각을 벌이는 동안 학교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처럼 되었지만, 하커의 어머니가 살아남았던 것처럼 그 이면에는 롱레그스와 캐리 간 모종의 거래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이 캐리라는 캐릭터보다는 롱레그스가 하커의 가족과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롱레그스의 모든 희생자들 중에서 하커의 가족만 유일하게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인지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한 것인지 영화 속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일절 없고, 아버지에 대한 어떤 단서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하커 가족 구성원 중 아버지의 부재는 롱레그스가 아주 괴이한 방식으로 대체한다. 영화의 제목에서 드러나는 '롱레그스'라는 단어는 키다리 아저씨의 영문명인 DADDY LONG LEGS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롱레그스'는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하커의 가족 구성원 중 아버지를 대체하는 존재로 자리하였다. 아버지가 없는 가족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협박하고 죽이려고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족 구성원을 자신의 살인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롱레그스의 작업실이 하커의 집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장면은 유사 대부처럼 자리했던 롱레그스의 존재가 하커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괴이하고 끔찍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난 뒤 기절했던 하커는 롱레그스의 작업실에서 깨어난다. 그가 깨어나는 장면은 위아래가 뒤집힌 장면으로 하커가 침대에서 깨어나서 롱레그스의 작업실 중앙으로 걸어가자 하커가 해당 공간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연출된다. 하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롱레그스는 바로 자신의 집에서 악마를 인형 안에 집어넣는 끔찍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커가 그 작업실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관객들은 그 공간이 바로 하커의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사 대부처럼 존재했던 롱레그스의 작업실이 하커의 집 지하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롱레그스라는 존재가 실질적으로 유사 대부의 이미지만 가져올 뿐, 정상적인 아버지의 역할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롱레그스>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중적으로 묘사된다. 롱레그스가 악마가 들어있는 인형을 제작하고, 그 인형을 하커의 어머니가 아무런 의심받지 않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배달해 주면 인형에 들어있던 악마가 빠져나와 그 집의 아버지에게 빙의되어 모든 가족 구성원을 죽이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이자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이지만,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살인마로 돌변한다. 악마의 저주로부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들은 하커와 하커의 어머니, 캐리, 그리고 엔딩 부분에서 살아남은 카터의 딸까지 모두 여성이었다. 공포 영화의 틀 안에서 <롱레그스>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들은 그동안 미디어 속에서 등장해 왔던 가부장제의 신화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서 하커가 자신의 상사인 카터의 집으로 가는 장면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유일하게 롱레그스의 저주에서 살아남았던 인물 하커. 그리고 롱레그스의 사건을 쫓고 있었지만, 정작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마는 카터. 특히 이 장면은 어머니 덕분에 모든 저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하커가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그 저주의 실체를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의 어머니는 악마의 지배에 따라 롱레그스가 다른 이들을 죽이는 것을 계속 돕고 있었지만, 그 딸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쏘아 죽이면서 악마의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카터가 자신의 아내를 죽인 뒤, 딸과 하커까지 죽이려고 다가오자 하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터를 쏘아 죽이고, 카터의 딸을 죽이려고 하는 자신의 어머니까지 쏘아버린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악마가 들어있는 인형까지 쏘아버리려고 했지만, 모든 총알이 떨어지고 말았고 하커는 이 인형을 부숴버리는 대신 뒤돌아서 카터의 딸을 데리고 나간다.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은 이 열린 결말은 여러 해석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커가 아직 악마의 저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덕분에 죽음을 면했지만, 영화 러닝 타임 내내 악마의 모습이 하커 근처 곳곳에 숨어있는 것처럼 악마는 매 순간마다 그를 노리고 있었다. 또한 자기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았으며, 상관까지 자신의 손으로 쏘고 말았다. 이는 아버지들에게 내리는 롱레그스의 저주가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 것처럼 보인다. 하커가 카터의 딸은 죽이지 않았지만 그의 딸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살면서 관람했던 영화 중 <롱레그스>가 가장 무섭고 공포스러운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롱레그스>가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 및 화면 연출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장센을 자랑하고 있기에 최근에 관람한 공포 영화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 이후 오즈 퍼킨스 감독이 다시 한번 배급사 네온과 함께 손을 잡고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앞으로 호러 영화 팬들이라면 오즈 퍼킨스 감독 이름만 믿고 그가 만든 영화들을 관람해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