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차를 탄 여자> 단평
※ 이 리뷰는 <하얀 차를 탄 여자>의 엔딩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여성 투톱’을 전면에 내세운 스릴러이다. 2022년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나, 정식 개봉은 다소 늦어진 2025년 10월 29일이다.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어 직접 극장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는 상처 입은 한 여인을 데리고 온 도경으로부터 시작한다. 도경은 칼에 찔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한 여성과 함께 병원으로 온다. 중상을 입은 여성은 급히 수술에 들어가고, 경사 현주는 도경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도경의 진술에서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지점이 많다. 조사를 하던 현주는 도경이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사건에 다가갈수록 오히려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는다. 얽혀 있는 여러 사실들 속에서 현주는 끊임없이 진실을 찾으려 한다.
영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이야기의 층위가 실로 복합적이다. 피를 흘린 채 나타난 여자와 맨발로 뛰쳐나온 상처 입은 도경. 두 여자를 둘러싼 사건은 영화 내내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립된다. 처음 도경이 진술한 이야기는 두 사람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도경의 조현병 사실과 도경에게 친언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서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틀린다.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사건의 플롯은 자칫 관객에게 지루함 혹은 혼란을 줄 수 있지만, 영화는 이 균형을 적절하게 유지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영화는 현주를 통해 관객이 진실을 같이 추적하도록 안내한다. 동시에, 사건이 반복 재연될 때마다 일부러 해소되지 않는 석연치 않은 부분을 남겨 관객이 계속 집중하도록 만든다. 도경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가장 의심스러운 캐릭터다. 현주의 말처럼 “조현병인 사람이 저렇게 멀쩡하게 운전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은 관객에게도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병원에 있는 은서에게 섬뜩하게 다가가 “할 말이 있으니 일어나라.”라고 깨우는 장면은 도경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불신을 극대화한다.
도경은 기존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밀을 지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운 여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 캐릭터에 가깝지만, 이 캐릭터가 뻔해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현주의 존재 때문이다. 현주는 사건의 진실을 캐는 조사자이자, 여성으로 설정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모두 가족에게 학대를 받은 경험이라는 공통된 트라우마를 공유한다. 도경의 친언니인 미경이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되고 도경이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 듯 보인다. 그러나 현주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도경이 경찰차를 훔쳐 달아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도경을 막아 세운 현주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 경험을 털어놓으며 “다른 가족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도경은 그제야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피해자로서의 트라우마와 고통을 공유하게 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지막 순간, 사건의 완전한 진실이 드러난다. 모든 일이 사실은 도경이 만든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관객이 알게 된 진실을 현주 역시 서울로 떠나기 직전 깨닫는다. 그녀는 순경 용재에게 전화를 걸어 진실을 알리려 하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 못한다. 도경은 언니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 도경과 감정적 유대가 생겨버린 현주는 도경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갖고 있었기에 그 진실을 쉽게 꺼낼 수 없다. 결국 모든 진실은 묻혀 버리고, 도경이 의도한 대로 사건은 마무리되며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스릴러라는 장르가 캐릭터의 성별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눈이 하얗게 뒤덮인 적막한 한국의 시골 풍경과 점차 층위를 탄탄하게 쌓아가는 이야기는 보기 드문 몰입감을 선사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계절, 색다른 스릴러를 찾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