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단평
※ 이 리뷰는 <국보>의 엔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여 화제를 모았던 <국보>가 11월 19일 국내 개봉하였다. 재일교포 3세로 잘 알려진 이상일 감독의 작품으로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 세계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가부키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서적으로 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앞섰으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평이 좋았던 만큼 세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기꺼이 체험하였다.
<국보>는 눈앞에서 야쿠자 보스인 아버지를 잃고 급작스럽게 고아가 되어 가부키 세계로 들어간 키쿠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쿠오는 가부키 명배우인 하나이 한지로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아들인 슌스케와 동고동락하며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맡은 남성 배우)를 연기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지로가 크게 사고를 당해 무대에 설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그를 대신해 키쿠오가 무대에 서면서 슌스케와 키쿠오 간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한다. 슌스케는 키쿠오의 무대를 보고 절망해 집을 나가고, 키쿠오는 한지로의 이름을 물려받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키쿠오가 맞지만 영화는 키쿠오, 슌스케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키쿠오라는 인물을 세밀하게 다룬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가부키는 가문의 영향이 절대적인 세계이다. 키쿠오는 압도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한지로의 이름을 물려받고도 주연을 맡기 어려웠고 등에 야쿠자 문신으로 가십 거리에 오르기도 했다. 이와 달리 슌스케는 뛰어난 가문을 갖고 있었지만 키쿠오와 같은 압도적인 재능은 가질 수 없었다. 그는 키쿠오의 연기를 보고 절망해 다른 길로 떠나버리는 선택을 한다. 영화에서 무대에 오르기 전 키쿠오가 슌스케에게 “지금 이 순간 너의 피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문의 힘이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저주받은 피와 뛰어난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재능. 얼핏 이 관계는 파국으로 향할 듯 보이지만 이들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서로 욱해 주먹다짐을 하는 순간은 있었지만, 가부키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의 세계에서 이 둘은 서로를 견제하는 라이벌이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료였다.
둘의 관계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소네자키 신주] 가부키 극이 나오는 장면이다. 처음에 극이 나왔을 때, 한지로를 대신해 무대에 올라간 오하츠 역의 키쿠오를 보고 슌스케는 좌절하고 자신의 부모 곁을 떠난다.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인 키쿠오는 이후 하나이 한지로의 이름을 물려받는다. 이후 두 번째 [소네자키 신주]가 나올 때 슌스케가 마지막 소원으로 오하츠를 맡고, 슌스케는 그의 연인인 도쿠베이를 맡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동반 자살을 같이 하겠냐고 물을 때 내미는 맨발은 처음 영화 속에서 등장했을 때 키쿠오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장치이나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발이 괴사 된 슌스케의 맨발이 보일 때는 죽음까지 불사르며 연기하는 슌스케의 모습을 나타낸다. 두 연인이 서로를 붙잡고 소네자키 숲으로 가는 장면에서 슌스케는 자신의 목발로 인해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처절한 심정을 드러낸다. 죽음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던 슌스케는 자신과 가장 닮아있는 캐릭터인 오하츠를 통해 생의 마지막 남은 불꽃을 무대에서 불태운다.
자연스러운 수순에 따라 슌스케는 영화 스토리라인에서 퇴장한다. 영화는 하나이 한지로, 슌스케의 죽음 모두를 자세히 연출하여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가 묘사했던 죽음은 오프닝에서 키쿠오 아버지의 죽음뿐, 가부키 배우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표현한다. 대사로만 단순히 그들의 죽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배우인 것처럼 무대 위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으로 그들의 등장을 끝냄으로써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빛나는 순간을 위해 배우들은 살아간다. 키쿠오는 가부키 연기를 할 때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환상들을 보았는데, [백로 아가씨]의 쏟아지는 눈 속에서 마지막 춤을 추던 백로 연기를 하던 키쿠오는 드디어 그 환상을 선명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어두컴컴한 공간 위 높은 곳에서 빛이 쏟아지는 환상이다. 관객들이 모두 사라진 이 환상은 자신과 무대만 남은, 무대라는 그 자체의 환상이다. 이 찰나를 위해 키쿠오와 배우들은 무대 위로 끝없이 오르고, 영원의 순간을 뒤쫓는다. 생명을 불태워서 찰나의 순간을 사는 것. 키쿠오는 인간 국보라 불렸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의 애인은 자신을 떠나 슌스케와 결혼하였고, 자신에게는 사생아가 있었으며 뒷배경을 만들기 위해 사귀었던 여자와는 도피생활을 하다가 포기해버리고 만다. 몰락한 가부키 배우로까지 살았던 ‘인간’으로서의 삶은 고난이 가득했지만, 나중에 만난 자신의 딸이 아버지로는 인정하지 않아도 배우로서는 최고라는 말을 한 것처럼 ‘국보’로서는 누구나 예를 갖출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영화 <국보>는 아주 오래전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녹아든 가부키를 통해 현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들의 삶을 조망한다. 삶의 모든 시간들이 아름답게 빛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지나간 것은 뒤돌아보지 않고 앞에 있는 찰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끝없이 달려간다. 찰나의 순간 무대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그 순간만으로 그 인생은 완전해질 것이다. <국보>의 엔딩 속에서 ‘키쿠오’라는 배우가 불멸자로 남아 관객들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을 기억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