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의 'Ending Credit'
내게 있어서 '엄정화'라는 사람은 가수라기보다는 배우로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가요계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다진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이 이상으로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게 더욱 정확한 말일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가 갑상선 암으로 투병 중이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앨범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이 소식은 내게 큰 의미를 지니지 않았고, 딱히 앨범을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보았다. ‘디바’라는 컨셉으로 여러 아티스트들이 출연한 무대였는데, 그곳에서 엄정화, 그녀의 무대를 볼 수 있었다. 무대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단번에 그녀의 모습에 매료되고 말았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인 ‘Ending Credit’이라는 노래를 들었던 순간인데, 이 노래를 듣고 나서 그녀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녀가 어떤 아티스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Ending Credit’이라는 노래는 가수로서, 배우로서 그녀의 삶이 오롯이 담긴 말 그대로 자서전, 그 이상의 노래였다.
처음 그녀가 무대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그녀가 노래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마치 그 무대라는 물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물고기와도 같았다. 첫 등장에서 그녀의 뒤쪽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칠 때, 그녀는 다시 완벽한 디바로 무 대에 되돌아왔다. 이는 그녀가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꿈을 놓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40대 여성 아티스트가 얼마나 존재하고 있을까. 희박한 숫자 속에서 그녀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그녀가 걸어온 길은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라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뒤로 하고 무대 위에서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이는 모든 고통과 시련마저도 껴안은 채, 이를 뛰어넘은 그마저도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생을 이겨낸 승리의 미소와도 같았다.
무대 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Ending Credit’이란 노래의 가사도 기억 속에서 생생히 남았다.
처음 본 순간 운명이라고만 딱 느꼈어
한 편의 영화 주인공 같던 난 이젠 없어
아름다웠던 순간
눈이 부시던 조명들
영원할 것 같던 스토리
수많았던 NG 속 행복했던 시간
사실 이 노래를 한편으로는 굉장히 서글픈 노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전성기가 끝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노래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직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다로 다시 무대에 오르겠다고 하는 다짐과도 같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노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엄정화의 무대가 더욱 인상 깊었던 이유는 그녀의 모든 표정, 행동, 몸짓, 춤에서 그녀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는 것, 여기에 그녀의 삶과 무대가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저 가사처럼 ‘아름다운 순간, 눈이 부시던 조명들, 영원할 것 같은 스토리’ 그것은 이미 그녀가 지나온 과거의 것들이다. 그녀는 이 가사를 부르며 그 과거에 대해 미련을 갖거나 그 과거가 다시 되돌아오길 바라지 않는다. 그녀의 가삿말은 말 그대로 그 순간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렇기에 그녀는 NG가 났던 그 순간조차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절이었기에.
지나온 과거의 것들에 대해 그 시절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추억하면서 그녀는 어떻게 다시 현실로 되돌아올까. 그렇기에 이 노래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이 부분이다.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 둘 퇴장하고
너와 나의 크레딧만 남아서
위로 저 위로
이 부분은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반복된다.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 둘 퇴장하고
너와 나의 크레딧만 남아서
새까만 프레임을 가득 채워
또 다른 영화는 시작됐고
관객은 하나 둘 입장하고
너와 나의 추억만 남아서
위로 날 위로해
반복되는 구절은 ‘위로’라는 말이지만, 두 말이 갖는 의미는 다르다. 첫 번째 가사에서 ‘위로’는 엔딩 크레딧이 위로 올라가면서 영화가 끝남을 의미하지만, 마지막 가사에서 ‘위로’는 말 그대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준다는 뜻이다. 영화가 끝날 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은 이 영화가 끝이 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면 위로 올라가 사라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은 기억되지 못하고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느꼈던 희로애락 모든 감정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모든 순간들이 끝난다고 해도 위로받을 수 있다. 자신이 무대에 서 있던 순간, 연기를 하던 모든 순간 그 순간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고 해도 모두의 가슴속에,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속에 가장 깊게 남아있다. 이 기억들과 모든 감정들은 한데 어우러져 더 이상 무대를 할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를 가슴 깊이 위로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그녀의 무대와 그녀의 인생은 하나로 겹쳐진다. 무대와 인생이 만나는 그 순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것처럼 무대가 끝났을 때 세상 누구보다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아름다운 그 사람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디바 ‘엄정화’였다.
그녀는 단순히 머리속에서만 기억되는 9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던 가수이자 연기자가 아닌, 이제 내게 삶과 무대의 일치를 몸소 보여주는 완전한 아티스트이며 디바이고 내가 나중에 나이든다면 꼭 그녀와 같은 모습이 되고 싶은 ‘롤모델’이 되었다. 나도 언젠가 모든 경지와 모든 고통의 순간을 넘어서 내 삶과 내 글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순간이 오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