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제일 좋아하는데, 인스타에선 아무도 안 읽더라. 짜증나는 놈들
흔히 SNS에서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나 <잘자, 푼푼>을 가장 절망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는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왜 이토록 절망적인 작품에서 일종의 쾌감을 얻는 것일까? 이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외로움과 불행이 심해진 반면, 그것을 해결할 사회적 통로가 줄어든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외로움과 절망, 끝없는 비교 속에서 만들어진 잘못된 행복관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공동체는 무너지고 있다. 모두가 외롭다고 말하지만 정작 서로를 받아주지 않는 모순적 상황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극단적 절망을 다루는 작품을 통해 공감과 연대를 확인하려 한다. 작품을 공유하는 행위 자체가 마치 작은 돗단배를 띄우는 것처럼 일종의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작품이 <푸줏간 소년>이다. 이 영화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보다 훨씬 더 잔혹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주인공 프랜시는 자살을 시도하는 엄마와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 이웃집 누젠트 부인의 폭력, 가장 의지했던 친구 조와의 갈등 등 구역질이 날 만큼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블랙코미디적 연출을 통해 절망과 우스꽝스러움의 기묘한 조합을 시도한다. 이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잔혹한 폭행 장면에 베토벤을 삽입하거나,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에서 폭력적 장면과 대중가요를 함께 배치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즉, 고통을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절망을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푸줏간 소년>은 냉혹한 사실 진열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이 파멸의 길로 빠져들면서도 여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지점들을 보여준다. 이는 개인의 파멸이 전적으로 운명적이지 않음을 일깨우며, 작은 관계적 개입이나 타인의 손길이 얼마나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구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절망을 미학으로 소비하는 차원을 넘어, 구원의 가능성을 영화적 아이러니 속에 함께 담아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작품은 무료로 유튜브에서 영문판으로 볼 수 있다. <릴리 슈슈>를 재밌게 보았다면, <푼푼>에 공감한 부분이 있다면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