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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gswann Sep 14. 2018

그는 비밀을 속삭였고, 나는 손톱깎이를 샀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영덕(영화덕후)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영화에 나온 장소를 직접 가보는 것이라 했던가. 어떤 영화를 보고 받은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그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훌쩍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낭만을 이해할 것이다. 나에게도 그렇게 떠난 적이 딱 세 번 있다. 영화 <인도차이나> 보고 갔던 베트남 하롱베이, <라라랜드> 보고 떠났던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화양연화> 보고 찾았던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와트.


평생 못 잊을 하롱베이의 절경
상공에서 내려다 본, 황홀한 로스앤젤레스의 야경


그 중 앙코르와트는 순전히 <화양연화> 속 양조위가 비밀을 속삭였던 그 곳에서 나도 내 비밀을 속삭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캄보디아 국경을 넘게 한, 가장 충동적으로 지른 여행 중 하나다. 물론 영화의 미장센을 완성한 양조위의 풍성하고 기름진 머릿결도 여행 뽐뿌에 한 몫 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바로 이 장면

그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앙코르와트를 찾았을 때, 나는 영화속에서 그려진 앙코르와트의 이미지가 환상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에서 보고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존재했던 것이다. 학교에 가 있어야 할 대여섯살 아이들이 "마담, 원딸라"를 외치며 생계를 위해 사진엽서 꾸러미나 앙코르와트 모양의 손톱깎이 등을 파는 모습. 양조위에겐 평생의 비밀을 속삭인 곳, 내겐 감성과 로망을 채우기 위한 여행지이지만 저 아이들에겐 생계유지의 터전인 곳이 앙코르 와트였다. 상상했던 적막이나 고요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이는. 한낱 영화적 감상에 빠져 낭만을 찾겠다며 씨엠립까지 날아온 내가 살짝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환상이 깨질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별 수 없이 환상은 계속된다. 

특히 이 감독의 영화들이라면 더더욱.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스토리가 아닌 어떤 느낌과 이미지, 색감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더 꿈 같고, 미스테리하고, 아련하다.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타락천사>로 이어지던 나의 왕가위 편애는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에서 정점을 찍고 나에게 스스로 '왕가위 팬'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했다. 샴푸 이름인 줄만 알았던 '미장센'이라는 용어도 왕가위 감독 덕분에 알았고, 한 감독(작가)의 영화(책)를 모조리 찾아보는 것을 '전작주의'라 부른다는 것도 왕가위 감독 영화를 찾아보며 알았다. 그의 작품들이 영화계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 감독 개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는 사실도 그와 그의 작품에 미스테리와 환상을 더하는 요소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또 홍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배경인, 동서양이 혼재된 세기말 분위기의 도시는 내게 가보지도 않은 홍콩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가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그래서 내 영화인생의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감독.



이젠 고전이 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으로 나오는 디스토피안적 미래도시의 홍콩스러운 분위기도 그래서 너무나 좋아한다. 물론 밤이어야 하고, 비도 내려야 한다. 모퉁이마다 도시의 우울과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먹고사니즘의 고단함과 왠지 모를 향수가 뒤엉켜 있는, 비오는 홍콩의 밤거리. 언제 또 왕가위 영화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홍콩행 비행기표를 끊어버릴 지 모른다. 가서 상상과는 다른 풍경을 마주할 지라도, 가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아쉽게도 이제 예전만큼 그의 영화를 즐겨찾지는 않는다. 무엇이 변한걸까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지만 취향의 변화려니 한다. 느낌 만으로 충분했던 때와 다르게 더 구체적인 설명을 원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왕가위 라는 이름과 그의 영화 제목들은 잊고 있다 꺼내보면 추억에 잠기는 학창시절 졸업 앨범처럼 기억 한 켠에 내 청춘 한 시절의 표상으로 꽂혀있을 것이다. 과거의 내가 그리울 때 어쩌다 한 번씩 꺼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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