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코틀랜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되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세컨더리 스쿨"이라고 부르는 학교를 6년 동안 다닌다. 6년을 전부 다니는 것은 대학에 갈 아이들이고 직업학교에 가거나 다른 길을 찾는다면 4-5학년에 졸업할 수도 있다.
첫째 딸을 세컨더리 스쿨에 보내고 나서 놀란 게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수업시간에 <드라마>를 배운다는 점이다. 과목 이름은 드라마지만 배우는 건 연극이다. 연극 감상도 하고 대본을 공부한다. 학생들은 직접 배우나 무대연출가가 되어 한 학기마다 연극 두 편을 실제 공연으로 만든다.
학년이 올라가면 드라마는 선택 과목이 된다. 안 배워도 된다는 뜻인데 영화와 뮤지컬 광인 딸은 1학년부터 5학년인 지금까지 드라마를 선택했다. 어느 학년엔가는 특수분장을 배우고 와서 끔찍한 사진을 보여준 적도 있다. 이런 걸 중고등학교에서 배운단 말이지?
특수분장 - 처음 볼 땐 놀랐는데 지금 보니 가짜 티가 팍팍
매우 신기했다. 학교에서 연극을 배우는 게 꽤 낭만적인 것 같았다. 역시 셰익스피어의 나라는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딸이 드라마까지 공부하는 게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는 법. 그 생각은 몇 주 전에 깨졌으니 이유는 바로 시험 성적 때문이다.
영국은 5학년과 6학년 2년에 걸쳐 대학입시에 필요한 시험을 치른다. 특히 5학년 때 보는 시험이 중요하다. 달리 말해 지금 딸은 입시생, 나는 입시생 엄마다. 지난 1월에 모의고사를 봤다. 지금껏 등수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저 잘할 것이라고 믿어왔던 딸이 드라마에서 C라는 성적을 받았다. B도 아니고 C를. 6과목 모두 A를 받을 줄 알았던 어미는 충격에 빠졌다.
시험은 총 3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우선 1) 연기점수가 들어가고 2) 연극대본 한편을 미리 읽은 뒤 에세이 쓰기 3) 연극 대본에 따른 질문 답하기로 나뉜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드라마라는 과목 자체가 쉽지 않은 거였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믿지 못할 대사가 내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걸 선택했어. 드라마 말고 점수받기 쉬운 걸로 하지!"
나도 깜짝 놀랐다. 뭐지, 이 한국 엄마다운 발상은? 이성적으로는 대학이 중요한 게 아니네, 원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하네, 행복이 먼저네 했으면서 막상 시험 성적 앞에 나는 점수지상주의의 깃발을 펄럭거렸다. 그것도 드라마 열심히 공부해서 A 한번 받아보자라는 말도 아니고 선택 자체를 나무라는 발언을 날리며. 무심코 뱉어놓고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멘털 강한 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과외 선생님 붙여줄까?"
"아니요."
바로 오늘 과목별 교사들과 학부모 면담이 있었다. 드라마 선생님은 이 과목이 원래 이렇게 어렵다면서 딸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모의고사 때보다 잘 나올 걸 믿는다고 했다. (둘째 딸 때도 그랬는데) 학교 상담을 하고 나면 꼭 이상한 기분이 된다. 학교 선생님들은 다 믿는 우리 아이를 나만 걱정하는 것 같다.
역시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한국에서는 맘만 먹으면 정보를 얻어내어 뭐라도 해줬을 텐데 여기서는 "정보얻기 = 영어공부 = 얼굴철판" 등의 공식이 필요하므로 웬만하면 아이가 알아서 할 거라고 믿는 게 최고의 선택이다.
그래 믿자 믿어. 세컨더리 마지막 학년에도 드라마를 선택할 거라는 내 딸인데. 차 타고 어딜 갈 때마다 각종 뮤지컬 음악을 섭렵하여 따라 부르는 모습을 봐 온 게 몇 년인데. 아이가 좋아하는 걸 맘껏 배웠으면 그걸로 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두루 포함한 연극을 6년이나 배우면 훗날 어떤 방식으로든 피와 살이 될 것이라는 것도 믿는다. 시험 점수를 원하는 만큼 못 받아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