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더 사랑할게
더벅머리 소녀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짧은 커트 머리 사이로 삐죽삐죽 제멋대로 솟은 머리칼이 마치 동물의 털 같아 보인다. 검은 뿔테 안경에 극세사 재질의 잠옷차림. 나보다 키가 10센티는 더 큰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먹을 거 좀 있어요?"
먹을 거?
뉘신지?
아... 내 딸이구나.......
몇 달 전 딸이 머리를 잘랐다. 얼핏 보면 남자애 같아 보인다. 오래전부터 자르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못하게 말렸다. 딸의 긴 머리가 더 좋았으니까. 미루고 미루다 지난여름 한국에 간 김에 미용실에 들렀다.
잘린 머리칼이 아쉬웠지만 딸이 원했으므로 받아들이려 했다. 문제는 몇 달 뒤에 일어났다. 딸이 섭취한 영양분의 대부분은 위쪽으로만 몰려 갔는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 머리는 흡사 푸른 들판의 잔디를 연상시켰다. 덥수룩해진 탓에 영국 미장원에서 데려갔는데 층을 심하게 내놓아서 다음날부터 고슴도치 가발을 쓴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던데 나는 꼴 보기가 싫었다.
"젤을 좀 발라보지 그래?"
집에 있는 헤어젤이며, 에센스며 왁스 같은 걸 찍어 바르나 싶더니 왁스가 가장 좋단다. 근데 학교 갈 때는 안 바르고 간다. 그 후 단 한 번도 바르지 않았다.
"머리 좀 어떻게 해봐. 왁스 왜 안 발라?"
"귀찮아서요."
".......!"
폐부 깊숙한 곳에서 불덩어리 같은 감정이 솟구쳐 입 밖으로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삼켰다. 대상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이 아이를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책이나 SNS를 읽다 보면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며 배우는 게 많다고들 한다. 나도 100% 동의는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도대체 몸에서 사리가 몇 개쯤 나와야 잘 키우는 건지. 내 뱃속으로 낳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인격체를 키우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
사춘기는 외모에 가장 신경 쓸 때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매일 아침 뻗친 머리를 동그란 빗에 말아가며 드라이하고 스프레이도 뿌리고 그러다가 학생 주임 몰래 앞머리를 파마한 뒤 등교할 때마다 실핀을 꼽아 숨기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왜 내 딸은 예쁘게 하고 다니는 데 관심이 제로란 말인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아무래도 피가 옅게 섞인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깔끔하게 하고 다녔으면 하는 건데 왜!
아이가 자라자 나와는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성향임을 알았다. 나는 말부터 뱉어 놓고 일단 저지르는데 선수라면 딸은 생각을 깊게 하고 관찰을 한다. 또 나는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시끌벅적하게 노는 걸 좋아하지만 아이는 혼자 있는 걸 즐긴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나, 무심한 딸.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두 자아는 종종 부딪혔다.
어느 날 가족 산책을 갔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딸의 손길이 느껴졌다. 조그마한 것이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노래가 들렸다. 자기가 듣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아무 말 없이 엄마 귀에 꽂아준 것이다. 나 같았으면 “내가 듣던 음악인데 같이 들으면 좋겠다, 이 노래 어때?” 하면서 종달새처럼 떠들어댔을 텐데 딸은 그저 음악만 들려줬다.
평소 살갑지 않은 딸이어서 그랬는지 예상밖의 행동에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알았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말로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작은 몸짓 하나에도 얼마든지 사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딸은 자신의 세계를 열어 나에게 보여줬다. 어떤 음악을 듣는지 공유하는 것. 그것이 엄마말 듣고 머리에 젤을 바르는 것보다 중요하다 여기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딸의 음악 취향을 알게 되었는데 나와 꽤 비슷했다. 드디어 공통점을 찾았다!
영국 문화를 생각하면 딸이 1년 반 후 대학에 가면 독립할 가능성이 크다. 함께 살 날이 1년 반 밖에 안 남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떠나면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겠지. 그땐 이해하고 인정하려 해도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더 어려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은 더 많이 사랑하고 노력해야 할 시간이다. 서른 살 더 많은 내가 참는다 참아.
딸이 섭취한 영양분의 대부분은 위쪽으로만 몰려 갔는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 머리는 고슴도치 가시의 과정을 거쳐 앙고라 털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또 잘라야 하는 게 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