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면 야구 공짜로 볼 수 있었는데

스포츠 광팬을 위한 종이접기

by 영글음

종합운동장에서 “와아!” 하는 함성이 들렸다. 또 시작이군. 때는 1993년. 일명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고1이었다. 조용히 해도 공부가 될까 말까 했지만 우리 고등학교가 운동장 맞은편에 있었던 탓에 야구 시즌만 되면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


경기시간은 자주 자율학습 시간과 겹쳤다. 환한 대낮에 해도 될 야구를 굳이 밤에 하다니. 그 탓에 안 그래도 공부가 안 돼서 싱숭생숭한 마음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두둥실 떠다니던 시절이었다.


“이제 곧 8회야. 너도 가자!”


함께 야자를 하던 희정과 정은은 서둘러 가방을 싸며 나까지 부추겼다. 야구 광팬인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8회부터는 관람표가 없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야구라면 경기 규칙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내가 짧게나마 경기를 직접 본 것은 순전히 얘네 덕분이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취약한 건 체육이었다. 그냥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띄게 못했다. 농구공을 던져 골 안에 넣는 시험을 봤을 때 우리 반에서 딱 3명만 한 개도 못 넣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다. 철봉에 올라가 배 깔고 앞으로 도는 것은 오직 나만 못했다. 체력장은 항상 5급. 스포츠라면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희정과 정은을 따라간 그날 경기장의 풍경은 나를 압도했다. 자리를 꽉 채운 관중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본 일이 있던가. 처음이었다. 밤이라 경기장을 비추는 커다랗고 밝은 불빛 때문인지 눈부시게 펼쳐지는 장면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영화를 찍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는 길 건너편 교실에 앉아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야구를 안 좋아하는 나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다들 소리를 지르려고 이곳에 오는 건 아닐까? 하고 결론짓던 밤이었다.




미국 고객인 닉이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명문 야구팀인 ‘뉴욕 양키스’를 주제로 결혼식 액자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단 하루였지만 강렬했던 그때. 어느 팀이 경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열기만큼은 강렬히 남아있던 순간이 빛바랜 필름 사진처럼 펼쳐졌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면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그것을 선물에까지 담으려는 마음도 이해 못 할 뻔했다. 닉이 주문한 액자에 들어갈 신랑과 신부 사이에 뉴욕 양키스가 어떤 연결고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이 소리는 있었을 것이다. “와아!”


“먼저 아이디어를 짜서 보여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을 못 잡겠다는 닉은 시작부터 나에게 맡겼다. 고객들은 대부분 결혼기념일 선물이 될 종이접기 작품을 위해 결혼사진을 보내온다. 하지만 스포츠처럼 특별한 테마가 있는 경우에는 함께 상의하며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저것 고심 끝에 야구팀의 로고를 출력하여 오려 붙이고 바탕이 될 종이에 줄무늬를 그렸다. 유니폼과 같은 무늬를 연출하고 싶었다. 그걸 본 닉은 차라리 신랑의 양복에 줄무늬를 그리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주었다.


A4 용지를 꺼냈다. 30cm 자를 대고 간격을 일정하게 하여 연필로 선을 그었다. 그것을 가로, 세로 15cm로 자른 뒤 양복으로 접었다. 조그만 로고를 그 위에 붙였다. 어느새 신랑의 정장은 뉴욕 양키스의 유니폼으로 변신했다.



골든 두들이라는 종류의 강아지도 접어야 했다. 털이 복슬복슬한 개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아마존에서 배달이 왔을 때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파손 방지용 종이를 구겼다가 폈다. 그것으로 강아지를 접었다. 예상했던 대로 구겨진 패턴이 마치 털 같아 보였다. 앞으로 같은 종류의 개를 접어야 할 일이 생기면 이 방법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닉 말고도 스포츠팬들의 주문을 받은 적이 몇 번 있다. 미국은 야구나 미식축구, 영국은 축구가 대세다. 지금껏 미국 고객은 응원하는 팀을 테마로 만들어 달라고 한 반면, 영국 고객은 자신이 속해서 직접 뛰고 있는 팀의 액자를 주문했다.


미식축구 프로 리그인 The National Football League를 응원하며


잉글랜드 3부 리그 중 하나인 Derby County Football Club 기념 축하 카드


여전히 스포츠에 폭 빠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나 결혼하여 같은 팀을 응원하거나 함께 운동을 하는 커플은 이미 1점은 먹고 들어간 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마지막 결승까지 잘 치러내기를. 심판이 휘슬을 불고 옐로카드를 내밀거나 아웃을 선언할 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축제 같은 관중의 함성을 잊지 않기를.


한 팀이 되어 세상을 향해 첫 경기를 펼치고 있는 세상 모든 신랑, 신부를 응원한다.



* 위의 글은 저의 책 <종이 접기처럼 살고 싶어서, 바이북스> 중 일부입니다.
*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이제는 8회 무료입장은 안 되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