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리는 “흐흐흐”였거나 “낄낄낄”이었다. 스코틀랜드 전통의상 킬트 제작자인 일레인과 나는 마주 보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머릿속에서 엇비슷한 상상을 한 까닭이었으리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우린 아줌마들이다. 지금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 문화에 관한 것이다. 다소 엉큼한 흐흐흐 혹은 낄낄낄에 관한.
Robertson 타르탄으로 만든 킬트 - 손녀가 할아버지를 위해 주문하여 만든 작품이다
종이접기 작가가 되어 킬트를 접다 보니 스코틀랜드에 더욱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건 이 나라에 정착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여자에게 킬트 접기를 맡겨준 스코틀랜드인을 바라보는 내 눈에도 자연스레 하트 필터가 끼워졌다.
종이접기를 하기 전부터 킬트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그걸 입고 있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무척 이국적인 풍경 덕분에 '뿅!' 하고 거주자에서 여행자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설레는 법이니까, 설레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으니까, 그러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니까, 그 기분을 자주 느끼고 싶어 혼자 버스 타고 에든버러에 가곤 했다. 그곳에 가면 킬트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길거리 연주자들이 많다.
킬트를 이야기할 때 꼭 빠지지 않는 게 있다. 그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는 그렇다고 하는데 요즘 시대에도 그럴까? 바람이 센 이 나라에서 치마가 펄럭이기라도 하는 날엔, 그런 날엔...! 뭘 상상했냐고? 여러 분이 방금 머릿속에 떠올렸던 바로 그 장면을 나도 떠올렸다. 몇 년 전, 진실을 밝히겠다고 킬트 가게를 찾아간 적이 있다.
목적지는 에든버러 성 바로 앞에 있는 <Tartan Weaving Mill and Experience>였다. 그곳 아래층에서 일레인을 만났다. 10년 넘게 수제 킬트 만드는 일을 해왔다고 했다. 맞춤양복처럼 고객의 주문을 받아 치수를 잰 뒤 직접 킬트를 제작하는 일이다. 그녀가 치마 뒷부분의 주름잡는 걸 지켜보다가 슬쩍 질문을 했다.
킬트 제작자 일레인
“안녕하세요?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일레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뭔데요? 말해 보세요.”
“저기, 킬트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던데 정말인가요? 요즘에도 그래요?”
“맞아요. 안 입어요. 간혹 애들은 입기도 하는데 어른들은 안 입는 경우가 많아요.”
설마 설마 했는데,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진짜요? 그러면 겨울에는 좀 춥겠는데요?”
“안 추워요. 지금 결혼식용 킬트를 만들고 있는데 이 걸 만져 봐요. 보온이 잘 되는 양털로 만든 거예요.”
일레인이 건네준 천은 꽤 도톰했다. 그래도 그렇지, 치마 아랫단에 뚜껑이 달린 것도 아니고 공기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간 바람이 맨살에 닿으면 추울 것 같은데. 내 의심의 눈초리를 읽었는지 그녀가 한 마디 보탰다.
“비장의 무기가 있어요. 이 주머니예요. 치마 안 쪽에 이렇게 달 거예요. 그러면 따뜻하답니다.”
이 주머니,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일레인은 아직 꿰매지 않은 주머니를 천에 대어 보여주며 치마를 입으면 그것이 정확히 남자들의 다리 사이에 온다고 했다. 주머니를 보자마자 나의 웃음소리는 금세 “푸하하하”로 바뀌었다.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친절하게 몇 가지를 더 일러주었지만 소리 높여 웃느라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겨우 웃음을 멈추고 진정한 나는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했다. 영어로 대화할 때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레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니까 이 주머니 안에 남자들의 거시기를......."
“어머나, 그게 아니에요. 푸하하하.”
이번엔 일레인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 주머니는 내가 상상한(?) 용도가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 킬트를 입어야 할 때 핫팩이나 핸드 워머 같은 보온제품을 넣는 주머니였던 것이다. 그러면 치마 속이 후끈후끈해서 절대 춥지 않다고. 어쩐지, 위치가 좀 어정쩡하다 싶었다. 이후 우리는 몇 초 간의 침묵을 벗 삼아 마주 보며 오묘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으흐흐, 낄낄낄.
킬트가 전통의상이라지만 역사가 길지는 않다. 16세기에는 타르탄 천으로 어깨에 걸쳐 몸을 전체 뒤덮은 다음 벨트를 매는 방식이었단다. 그러다가 1720년대 토마스라는 사람이 윗옷과 치마를 분리시키면서 오늘의 킬트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1746년 쿨로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진 뒤 킬트 착용이 금지됐지만 여차 저차 하여 1782년에 풀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대표 의상이 된 것은 19세기 문화 부흥 시기를 거치면서 부터다. 길어봤자 2-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근대 의상이다.
이후 킬트를 입고 있는 발모랄 호텔 도어맨, 킬트 판매자인 키스 등 스코틀랜드 문화를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킬트와 속옷에 대해 묻고 다녔다. 일레인은 확신에 차서 “No”라고 대답했지만 다른 이들은 “사람에 따라 입기도, 안 입기도 한다”라고 일러 주었다.
킬트 판매자 키스 (Keith) - 지난주 방문
"대여를 하게 되면 대부분 속옷을 입죠. 위생상의 이유로요."
키스의 설명에 따르면 보통 결혼식에서 입는 킬트는 대여해서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빌려주는 곳에서 속옷 착용을 권한다고. 하지만 조상 대대로 스코틀랜드 혈통만 있는 집안이라면 안 입는다는 게 사람들의 공통된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다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킬트 아래 남자들의 허연 엉덩이가 보인다고 해도 너무 놀라지는 마시길. 그들이 알짜배기 스코틀랜드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