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성(아이덴티티)에 대하여
정체성을 찾으면 삶이 순탄해 질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흘러가는 세월에 따라 학생, 직업인, 아들과 딸, 그리고 부모 등의 정체성에 맞게 살아간다. 그중 직업인은 각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준다. 또한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해 준다.
늦게만 느껴졌던 불혹의 나이 마흔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수차례 겪어 왔다.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정체성이 여러 차례 바뀌기도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정체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함을 알게 되었다.
8년 전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의 허물을 벗었다. 홀로서기를 하면서 월간잡지 ‘기자와 칼럼니스트’, 곰 인형의 눈깔 붙이기와 같은 단순한 ‘알바생’, 먼지가 가득한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고 함바집에서 한 끼니의 식사를 해결하는 ‘노가다’, 한 권의 책을 출간한 ‘저자’, 그리고 강단에 서서 입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강연가’ 등의 정체성을 경험했다.
한 권의 책을 출간한 이후 몇몇 지인들께서는 네게 ‘작가’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책을 출간한 것은 한 권이지만 7년 동은 매주 월요일마다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고 생각을 덧붙여 글을 써왔고,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글로 남겼기 때문이다. 나 또한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원했기에 하나의 꿈을 이룬듯했다.
작년 2월부터였다. 7년 동안 목숨처럼 지켜왔던 월요편지를 중단했다. 이후 글쓰기에 자신감은 홀씨가 되어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가 버렸다. 글쓰기의 감각은 전신마취를 한 채 1년이 흘렀다. 언젠가부터 ‘작가’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워졌다. 사부님께서는 ‘원고지로 지은 집’이라는 뜻의 ‘고당(稿堂)’이라는 호까지 내려주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도 하지 못하는 불량 제자가 되어버렸다.
홀로서기를 시작한지 8년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 48년 동안 겪어 왔던 정체성은 밤새도록 연필로 쓴 연애편지를 새벽에 깨끗이 지워버린 듯 백지가 되었다.
며칠 전 한 스님의 글을 읽었다. 스님은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봐야 한다.”고 했다. 사물에 이름을 짓는 순간 그 기능으로만 사용될 뿐 그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것을 ‘상(相) 놀음’이라 했다.
지나온 날들 동안 공부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공자는 “君子不器(군자불기),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즉 한 가지 기능에만 한정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정체성에 머물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재해석이 가능하다.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라고 했으니 이는 스님의 말처럼 상(相) 놀음을 하지 말고, 공자의 말처럼 하나의 기능에 한정짓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노자는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도 그것이 비어 있어야만 그릇으로써의 쓰임이 있다. 埏稙以爲器(연직이위기) 當其無有器之用(당기무유기지용)”라고 했다. 혹여 그릇이라 이름을 지었다면 채워놓지 않고 비워놓아야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장자는 친구 혜시와의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시가 말했다.
“위나라 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기에 이를 심었더니 나무의 열매가 다섯 석이나 될 정도로 열매가 열렸소. 물을 담는 그릇으로 쓰자니 너무 무거워 쉽게 옮길 수 없고, 쪼개어 바가지로 쓸 경우 납작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었네. 확실히 크기가 크기만 컸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부수어 버렸다네.”
이에 장자가 답했다.
“지금 자네에게 다섯 석이나 되는 커다란 박이 있는데, 어째서 그것으로 큰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않고, 납작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 걱정하는가! 자네는 꽉 막힌 사람이로군.”
이렇듯 공자와 노자 그리고 장자의 이야기를 통한 배움은 내게 ‘정체성’에 대한 허망함을 택배로 안전하게 배달해 주었다. 어쩌면 지나온 날들 동안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집착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정체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 책상 서랍장에 넣고 자물쇠를 잠그고 나니 비로소 자연의 향수를 뿌린 자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