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무슨 공부야?!” 할아버지는 반대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사정사정해서 고등학교에 겨우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노선에 뛰어들었다. 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가정주부로 지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손으로 무언갈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손끝에서 흘러넘치는 재주를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이 주름종이로 온갖 꽃을 피워내고, 구슬을 꿰어 가방을 만들고, 사람 크기만 한 십자수 등 온갖 것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자랐다. 엄마는 다시 일을 나가야만 했다. 하루 12시간 온종일 불 앞에서 돈가쓰를 튀기고 발이 너무 아파 가다 서다를 반복해 겨우 집에 돌아오면 싱크대에 설거지가 가득했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일을 했다. 콩나물 국밥집으로, 칼국수집으로. 노하우를 차곡차곡 쌓아 당신만의 레시피로 칼국수집을 차렸다.
개업한 지 한 달 채 되지 않았는데 단골이 생겼다. 그때 나는 남몰래 상상을 하곤 했다. 자그마한 식당에 손님이 바글바글하고, VJ특공대가 맛집 취재를 나오는.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칼국수의 맛은 끝내줬으니까. 얼마 안 가 그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가게에서 일을 하다 엄마는 사고를 당했다.
그날로 엄마는 약 3년간 병원에 입원을 했다. 수차례 수술대에 올랐다. 허벅지에서 근육을 떼고, 종아리와 골반에서 뼈를 떼고, 혈관을 이식해도 오른손을 원래처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붙여도 극심한 통증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시간을 엄마는 온전히 견뎌냈다. 누구보다 평온한 얼굴로.
평생 써왔던 오른손이 아니라, 펜 하나 제대로 쥐기 어려운 왼손 한 손으로. 삐뚤빼뚤 유치원생 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 그럼에도 그냥 그렸다. 매일매일, 계속 계속. 그렇게 10년이 흘러 엄마는 협회에서 인정하는 정식 작가가 되었다.
엄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화가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통증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살기 위해 시작한 그림이 엄마에게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한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엄마의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한다. 24시간 내내 통증을 가진 사람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그렸다고 믿기지 않은 밝고 명랑하고 유쾌한 그림. 그림들은 엄마의 표정을 닮았다. 단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다는 평온하고 장난스러운 그 얼굴.
엄마는 그림이 너무 재밌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말 하루 온종일 그림만 바라본다.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연구하거나.
엄마는 행복과 풍요를 가져다주길 바라며 그림을 그린다. 그 기운이 분명 그림을 받는 사람에게 전해진다 믿는다. 그래서인지 사업하는 분들이 특히 엄마 그림을 좋아한다. 사업장에 걸어두면 복이 들어올 것 같다고.
나는 우리 엄마가 아주 오래오래 좋아하는 그림을 맘껏 그렸으면 좋겠다. 엄마의 작품활동을 전폭지지해주고 싶지만, 딸이 해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대신 엄마가 그림으로 더 멀리 가닿을 수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 엄마의 행복과 풍요가 가득한 그림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아 좋은 기운을 전할 수 있게. 딸의 시선으로 엄마의 그림과 삶을 전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