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친 캔버스

by 송조



몇 년 전에 쓴 일기를 발견했다.

2018.09.18 망친 캔버스




엄마가 한 손으로 명화 그리기를 시작하더니 그렇게 그려낸 캔버스가 몇 개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엄마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하는 수채화반을 등록했다.



얼마 전 본가에 갔다가 웬 파도 사진이 걸려있나 해서 가까이 가보니 그림이었다. 코 앞에서야 그걸 알아챘다. 이게 왼 손 한 손으로 그린 거라고?



처음이 미숙한 건 너무나 당연한 건데도, 나는 언제나 나의 미숙함을 견디지 못했다. 매번 다이어리를 끝까지 쓰지 못한다. 예쁘게 쓰고 싶은데 그렇질 못해 결국 찢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맨 앞 한 두장이 찢긴 다이어리는 방치되다 몇 년 후 결국 쓰레기통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살아왔다. 인생에서도 미숙한 첫걸음을 견디지 못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얼마 전 엄마가 다니는 수채화반에 자신은 화가가 될 거라며 호기롭게 등록한 사람이 왔다고 했다. 그 사람은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엄마는 그 사람 얘기를 하면서 안타깝다고 했다. 처음부터 잘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엄마 본인은 수업에서 항상 망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했다. 그렇게 망친 캔버스가 쌓여 오늘의 파도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쾌하게 내뱉은 ‘망쳤다’는 말은 잘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낮추고 오히려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엄마의 얘기를 듣고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망치는 게 무서워서, 허접한 내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가만히 있던 과거를 되풀이하던 날들. 나도 매일을 망치기로 했다.




그 후 7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엄마는 동네 문화센터 유화반을 시작으로 공모전에서 9회 수상을 하고, 한국여성작가협회에서 정식 작가가 되었다.



엄마는 여전히 매일 그림을 망친다. 잘 그리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과감하게 엎어버린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랬던 게 저렇게 됐다고? 놀랍다.



엄마가 그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면 부끄러워진다. 수많은 붓터치와 수정 끝에 완성이 되는 거구나. 나는 염치없게도 그냥 바로 완벽한 결과물을 바라며 살아왔던 거구나.



나는 여전히 나의 미숙함을 보기 힘들어한다. 잘하고 싶어 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들. 그럴수록 미숙한 채로 남아있는 나. 그런 내가 미운 나에게 엄마의 그림이 손을 내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자고.



브런치와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가 쓴 글이 구리고, 글 속에 내 모습이 짜쳐도. 그냥 계속해보자고. 언젠가 나만의 파도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올 거란 걸 이젠 알게 됐으니까.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도 내 옆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집 안 한 켠에 있는 엄마만의 작은 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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