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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훈 Oct 23. 2022

하염없이, 걷는다

경기 둘레길 1~30코스 완보기(1)

'You take your own speed of relaxing here'

스스로 선택한 내 삶의 속도로 살아간다.  

- 하시시 박(Hasisi Park) 展


북촌 한옥마을 휘겸재 안채에 걸린 이 글귀가 문득 눈길을 끌었다. 내 삶의 속도를 여유 있게 가져갈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삶이 풍요해질까. 화두(話頭) 하나를 안고 배낭을 꾸렸다.

저 산 허리에 검은 구름이 몰려있다. 물크덩한  공기. 손가락으로 찌르면 금방이라도 빗물이 나올 듯 후덥지근한 날씨다. 지장산 입구. 산 이름도 생소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산을 향해 인사를 드렸다. 둘레꾼의 입산을 받아 주시고 종점까지 잘 인도해 주십사 간청드렸다.



산을 만나면 늘 평온하고 정다운 이를 대하는 것 같다. 산을 보면 마음이 열리고 짙은 녹음(綠陰)에 매료된다. 그러나 산이라고 항상 잘 대해 주지는 않는 것 같다. 계곡에서 여러 번 길을 잃어 헤매게 하고, 경치에 취해 딴전을 피우다 고생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산 정상에서 종아리에 쥐가 나서 혼쭐이 나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는 산이 좋다. 자연 속 둘레길 따라 하염없이 걷는 것이 이제 일과가 되었다.


작년 12월, 경기 둘레길 860Km , 60코스가 11월에 개통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전체 길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하고, 매주 하루씩 걷는다면 '1년 걷기 농사'로서 제격이란 생각이 들어 바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서울 둘레길(158Km)을 세 번 완주한 경험도 있고, 경기도 외곽을 따라 새로운 길 찾아 걷는

것도 꽤 의미가 있어 보였다. 1코스인 김포 대명포구~문수산성(13.6Km)의 철책 길에서부터 30코스인 양평 계정1리~양동역 입구까지 9개월 에 걸쳐 코스의 半을 걸었다.


되돌아보니 대단한 여정이었고, 혼자서 움직이니 우여곡절도 꽤 있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순조롭지 못한 교통편이었다.  둘레길 시점과 종점으로 진입하는 대중교통 버스가 하루에 몇 번밖에  운행하지 않아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때로는 택시를 이용해야만 했다.

DMZ 외곽을 연결한 평화누리길은 둘레길이 아니라 자전거길을 그냥 걸어야 해서 피곤하였고, 도로변이라 시끄럽고 공기도 좋지 않은 편이었다. 임진강을 따라 문산으로 들어서니 산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연천의 군남 호수 조절지는 북한의 댐 개방에 대응하려고 만든 시설로 웅장한 모습을 보니 북한과 지척 거리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굽이굽이 임진강을 따라 황희 정승이 여생을 보낸 반구정, 화석정, 숭의전, 전곡리 주먹도끼 등 문화유산들을 들러보며 의미를 새겨 보았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코스는 12코스부터 있는 국유림 구간이었다. 산불예방으로 5월 중순부터 신고제로 개방된 임도인데, 첩첩산중이라 적막하고 원시의 모습이 살아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길섶에 무성한 산딸기나무에서 산딸기를 따먹는다. 노란 금계국과 하얀 개망초가 사이좋게 피어 있거나, 간혹 만나는 둘레꾼을 보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다 보면 심심하지는 않다. 여름 장마철, 빗방울이 나뭇잎에 후드득 떨어진다. 계곡에는 바위를 타고 넘치는 물살 소리로 요란하다. 하늘은 검푸르고 땅은 황토색이다. 임도를 걷는 사람은 나 밖에 없고 그저 내 숨소리만 들린다. 넓은 대자연에 작은 풀잎 같은 존재일 뿐이다.


국유림을 지나면서 심각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래종 '칡넝쿨'이 너무 많았다. 주로 하천변이나 언덕, 섬, 숲뿐만 아니라 국유림에서도 번창하고 있었다. 이 넝쿨은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해서 그냥 가지만 쳐서는 안 되고, 뿌리까지 제거해야 할 만큼 '생태계의 베스'로 불린다. 해가 갈수록 증식 속도가 빨라지는 이 넝쿨들을 없애지 않으면, 많은 수목들이 햇빛을 보지 못해 죽을 것이다. 한국의 산하(山河)가 넝쿨 산하로 변한다니 정말 두려운 일이다. 정부 차원에서 전수 조사하여 대대적으로 제거작업을 빨리 해야 할 거라고 생각된다. 경기 북부의 산을 잇는 임도를 거쳐 오면 자연휴양림들이 있어서 도시민들의 휴양처가 되고 있었다.

길을 하염없이 걷자니 불가의 '묵언수행'이 이게 아닌가 여겨졌다. 여러 생각들, 분심(紛心)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화를 내게 한 불편한 동료,  아내와의 말다툼, 일몰처럼 저무는 미래, 메시지를 보냈으나 회신이 없어 걱정 등...


전에는 가급적 이런 분심을 지우려고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게 쉬운가. 길을 걸으면서 차라리 온갖 잡념들이 나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휘발유가 연소되어 날아가듯, 제각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는 며칠 후 하나씩 해결되거나,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길을 걷는 자체가 '힐링'임을 깨달았다.


길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 길의 속성이다. 인생길처럼 평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순응하며 걸어야 한다. 때로는 새로 난 길을 기웃거리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길은 우리와 친숙하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이 길고 험한 길을 연결하고 표지판을 달고 안내해준 관계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둘레꾼뿐만 아니라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지방의 샛길들이 갈수록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다. 길은 늘 기대의 대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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