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와 부산에서 한 달 살기
새벽마다 나는 닌자로 변했다. 부산에서 송이와 단둘이 한 달 살기를 결심할 때만 해도 저녁이 있는 삶을 상상했다. 송이를 재우고 매일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저녁이 있는 삶.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뒤꿈치로 쿵쿵 걷던 내가 이렇게 사뿐사뿐 다닌 적이 있던가.
숙소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지난 5월, 부산에서 2박 3일 휴가를 보내는 동안 오피스텔 한 곳과 미리 계약했다. 광안리 해수욕장이 코앞에 있는 곳이라 단기 임대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시원한 바다 전망의 투룸은 원룸보다 2~3배 더 비쌌다. 투룸을 포기하는 대신 측면 발코니로 바다를 볼 수 있는 스튜디오형 원룸을 골랐다. 전용면적은 26제곱미터, 대략 7.8평의 방이었다.
송이와 원룸에서 살아보니 육퇴 후에도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송이는 랩탑 타이핑 소리나 간접 조명 불빛에 깨기도 했다. 나는 닌자처럼 살금살금 걷고 맥주를 마시기 위해 일단 화장실에 들어가 캔을 따고 다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세 번 설거지를 했고 최소 한 번은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혼자 또는 커플의 한 달 살기와 아이와 한 달 살기는 장르가 다르다. 전자가 로맨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가깝다면 후자는 본격 요리 프로그램 <삼시세끼>랄까. 인생 18개월 차 송이에게 바깥 음식은 간이 세서 배탈이 쉽게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며칠 걸리지 않았다. 부산에 내려온 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송이는 묽은 변을 자주 싸기 시작했다. 근처 소아과에 들러 장염 약을 처방받았고 상태가 금방 나아지지 않아 거의 매주 소아과에 들렀다. 의사는 아이가 외식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냐며, 삼시 세 끼를 해 먹이는 걸 권했다. 나는 평소 저장해 둔 부산 맛집이 가득한 지도 앱을 여는 대신, 검색 앱에서 ‘소고기무국 끓이는 법’, ‘감자 찌는 법’, ‘고등어 굽는 법’ 등을 수시로 물었다.
말로만 듣던 1차 반항기(18개월~36개월)도 현지에서 체감했다. 이전과 다른 점은 싫다는 표현이 분명하고 설득되지 않으면 떼를 쓴다는 사실. 어쩜 그리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니”란 말을 남발하는지, 하루 최소 한두 번은 대치하는 일이 생겼다.
다행히 송이의 귀여운 반항과 배탈 증세 외에는 다른 문제가 없었다. 송이와 부산 곳곳을 매일 누볐다. 부산어린이대공원, 사상근린공원, 유엔평화공원, 동백섬, 국립해양박물관, 부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증권박물관 부산관 등이 아이와 다니기 좋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당일치기 여행으로 경주와 거제에 다녀온 적도 있다. [쿠키 영상 보기]
그중 내가 송이 덕분에 배운 순간들이 떠오른다. 한 번은 부산어린이대공원에서의 일이다. 부쩍 유아차를 타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송이와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나란히 걷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빠가 너에게 자유를 선물했구나.” 내 자유가 소중한 것처럼 너의 자유도 중요하지. 내가 놓쳤다. 그 뒤로는 송이의 의사를 더 적극적으로 묻게 됐다.
또 하나는 거의 매일 들르던 바다에서다. 송이에게 바다를 경험해주고 싶어 한 달 살기를 결심했던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겁 없이 바닷가로 향할 때마다 겁을 냈다. 천진난만하게 파도에 호기심을 보이며,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송이의 태도를 보며 내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바다 수영을 마친 뒤 끈적끈적해진 몸 때문에 찌푸린 내게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닷물에 좀 젖으면 어때. 바짝 마르면 모래들도 잘 떨어진다.” 그래, 옷이 젖으면 말리면 되고 세탁하면 되지. 이것저것 다 따지면 언제 바다에 들어갈까.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와 하늘을 매일 볼 때. 잠드는 순간까지 파도 소리를 들을 때. 우주정거장에 있는 비행사처럼 고요하고 적막하며 고립된 기분이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이 결국 가족이라는 걸 체감할 때. 송이의 인지 능력이 부쩍 향상되면서 내게 새로운 즐거움과 기쁨을 줄 때. 서울에서 지지고 볶던 아내의 존재 자체가 너무 든든한 위안이 될 때. 나는 잠시 서울을 떠나 부산에 오길 잘했다고 확신했다. 살면서 닌자로 변신할 일이 또 있을까. 내가 밤마다 사뿐사뿐 다니는 동안 송이는 놀라울 정도로 쑥쑥 자랐다.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산소를 그리워하듯, 극한 환경에 처하면 평소 누리던 것의 소중함을 느낀다. 부산에서 송이와 온전히 보낸 시간은 내 육아휴직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다.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그동안 공기처럼 당연히 여기거나 보이지 않아 잠시 잊고 있었던 공동체의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점. 아이는 홀로 키울 수 없다.
부산에서 다양한 경로로 도움을 주거나 조건 없는 환대를 베풀어준 분들이 있다. 송이와 다닐 만한 곳을 적극 추천해주신 김동길 팀장, 놀이터에서 송이를 아껴준 현대일신유치원 친구들, 한 달 내내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준 스튜디오 도이의 종은+지훈 부부, 숙소를 내 집처럼 편히 쓸 수 있게 배려해준 김우진, 따뜻한 마음으로 책을 보내주신 고수리 작가, 손혜정, 미디어창비, HB프레스 출판사, 송이를 보러 멀리서 와 주신 조퇴계와 오피스제주, 조부모님들, 앵커바 손용주 대표, 영도 앤즈가든 사장님, 희가건축 김경희 대표, 육아 동지 이지홍, 경주에서 만난 이근, 광안리에서 비타민 사탕을 나눠주던 어느 아빠에게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내 무모한 한 달 살기를 지지하며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와 준 아내에게 특별히 고맙다.
글 | 손현 (2022.12.4)
Note. 육아일기를 가장한 아빠들의 성장일기 '썬데이 파더스 클럽(Sunday Fathers Club)'의 마흔두 번째 뉴스레터로 발행된 글입니다. 당시 18개월 차 딸과 부산에서 한 달 동안 지낸 이야기를 썼습니다. 매일 숙소 앞을 나서면 보이던 바다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부산을 떠나고 나서야 실감했어요. 언젠가 딸이 더 커서 자유롭게 외식할 수 있을 때, 그곳으로 다시 여행 가고 싶습니다.
이 뉴스레터는 여러분과의 공감을 통해 전투 같은 육아현장에서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갑니다. 부모와 양육자들의 진솔한 생각이 궁금한 분에게 이 레터를 추천해주세요. (구독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