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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훈 Jun 16. 2021

당신은 어떤 문패를 달고 싶나요

문패에 담긴 주인의 마음들

사람에게 저마다 이름이 있듯이 집에도 문패가 걸려 있다. 주로 주인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덩그러니 지번이나 아파트 호수만 표시된 곳도 많다. 드물게도 그 집의 내력이 궁금해질 만한 문패나 현판을 볼 때면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눈발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돈의문 터를 지나 강북삼성병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눈은 짧고 굵게 왔다. 금세 화살나무에 눈꽃이 피었고 한옥마을 처마에는 백설이 소복이 덮여 있었다. 병원 입구 너머로 1938년에 지은 초호화 주택 경교장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역사적인 건물이다. 문득 선생이 붓글씨로 남겨 늘 새겨 두었다는 글귀가 떠올랐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 잔잔한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듯,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흐트러지지 않도록 눈길을 똑바로 걸었다. 내 발자국이 누군가에게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말이다.


행복한 마음, 이상향을 담은 딜쿠샤

인왕산 가는 길목인 행촌동에 도착했다. 높게 경사진 골목에는 수령이 460년 정도 된 우람한 은행나무가 있고 그 옆에 ‘권율 도원수 집터’라는 표시가 있었다. 맞은편에는 붉은 벽돌로 된 멋진 이층 집이 있었다. 표지석에는 ‘딜쿠샤(DILKUSHA) 1923’라고 적혀 있었다.


딜쿠샤 1923 ©손훈


이 집은 ‘딜쿠샤’로 불리게 된 사연이 있다. 사연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2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역상이자 미국 AP통신 특파원인 앨버트 테일러는 아기 출산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현재 서울역 앞 연세 세브란스 빌딩)에 있었고, 그때 병실 침대 아래 누군가 숨겨둔 독립선언서를 발견했다. 테일러는 동생에게 기사 와 함께 이를 비밀리에 보내어 3.1 독립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하게 했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 미국으로 추방됐다. 그리고 1948년 숨을 거두며 자신의 유골을 사랑하는 코리아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테일러는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먼저 안장된 아버지 묘역 곁에 돌아와 묻혔다.


당시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이자 갓난아기였던 이가 브루스 테일러다. 그가 나이 90세 기념으로 자서전 《은행나무 옆 딜쿠샤》를 펴내고 2006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그의 가족 이야기와 딜쿠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또한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는 2016년 2월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아와 의복, 문서, 편지류 등 조부모의 유품과 서울 생활 당시 소장품 350여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테일러 가족은 1923년에 지은 가족의 집에 왜 ‘딜쿠샤’란 이름을 붙였을까? 딜쿠샤는 ‘행복한 마음, 이상향’을 의미하는데, 부인 메리가 인도 에서 방문했던 러크나우의 궁전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딜쿠샤는 그동안 거주인들이 있어서 보수를 못하고 있다가 70년 만에 원형을 복원해서 올해 3월 1일부터 시민에게 개방됐다.


테일러 가족이 보여준 진한 인간애와 희생, 용기에 가슴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 민족도 아닌 외국인이 이토록 가난하고 핍박받던 한국인을 위해 싸우고 대를 이은 사랑을 보여주니 얼마나 놀라운가. 딜쿠샤는 그저 말하기 좋은 ‘행복한 마음’이 아니라 박애로 채워진 그들 가족사의 원형(原形)이 아닐까.


진짜 자기(眞我)를 찾으려는 의지를 담은 심우장

문패에 연관된 다른 집의 사연도 있다. 성북동 성곽 아래 위치한 ‘심우장(㝷牛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집이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일제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옥고를 치른 후, 1933년 지인들 도움으로 여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방 두 칸짜리 허름한 집을 지어 심우장으로 이름 붙였다.


심우(㝷牛)란 ‘소를 찾는 것’을 말한다. 사찰에 가보면 대웅전이 있고 벽면에는 10개의 그림이 나란히 그려져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린다. 십우도는 소치는 동자가 소를 찾아 산속에서 헤매는 광경부터 시작한다. 소의 발자국을 따라 찾은 다음, 그 소를 길들여 타고 집에 돌아오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는 선(禪)의 최고 경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소는 ‘참나(眞我, 진아)’를 의미한다.


심우장 ©손훈


한용운 선생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남쪽과 마주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을 무적자로 키우며 일본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내지 않고 당신이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 일제가 주는 쌀 배급도 거절했다. 그래서 부인이 삯바느질, 삯 빨래를 하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선생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집필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지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님이기 전에 행동가였고 지도자였다. 시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양심에 철저했던 지식인이었다. 우리는 그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심우장에서 엿본 그의 본성은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구도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문패만 보아도 주인장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성북동은 문화와 예술의 보고다. 1930년 이래 많은 예술인들이 이주하여 모여 살았다. 늙은 감나무가 있는 집인 노시산방(老柿山房)은 화가 김용준과 김환기의 인연이 서린 곳이다. 소설가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砚山房)은 ‘벼루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글을 쓴다’는 집이다. 문패만 보아도 정감이 있고 주인장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지금은 도로로 포장된 성북천을 내려오다가 사거리에 이르러 오른쪽 골목에 자리한 최순우 옛집으로 들어가 보자. 이 도시형 한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의 집이다.


최순우 옛집. 맨 우측 사진은 오수당(낮잠 자는 방). 단원 김홍도 화첩에서 따왔다. ©손훈


120평 대지에 ‘ㄱ’ 자 형 안채와 ‘ㄴ’ 자 형 바깥채가 마주 보고 있는, 트인 ‘ㅁ’ 자 형 집이라고 한다. 내가 본 한옥 중 가장 멋스럽고 친근하여 오래 살고 싶은 안락함을 지녔다. 안채의 사랑방은 서재 겸 침실로 보이는데 방 입구에 선생이 직접 썼다는 현판 글이 있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니 곧 깊은 산중이구나.’


문창살은 용(用)자살이다. 그는 “용자살은 가장 정갈하고 조용하며 황금률이 적용된 쾌적한 비례의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평하였다. 안락한 서재에 가로 1, 세로 1.618의 비례로 창살 너머 달빛이 비치면 얼마나 로맨틱할까. 게다가 문을 닫으면 깊고 교교한 산중이니 사색과 명상의 세계가 따로 있겠는가. 뒤뜰에는 선생의 손길이 담긴 석물들과 물확이 있고 ‘오수당(午睡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낮잠 자는 곳’이라는 뜻으로 단원 김홍도의 화첩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낮에는 햇살이 졸음을 돋우니 자연스레 오수를 즐기는 선비의 여유가 느껴진다. 고층건물과 아파트 살기에 길들여진 우리네 삶과는 괴리감이 들지만 무척 부러운 건 사실이다.


몇 년 전, 서울 송파에서 4년간 산 적이 있다. 전보다 방이 하나 많아져서 내 서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전부터 생각해둔 방 이름을 지인에게 붓글씨로 부탁했다. 그 이름을 액자 속에 걸어두고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소요유(逍遙遊) ©손현


소요유(逍遙遊). 장자(莊子) 내편에 나오는 글귀로 ‘자유롭게 노닐다’라는 뜻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상상하고 나래를 펴자는 취지였다. 가족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지 아예 들어올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공간에서 책을 보다가 졸기도 하고, 음악을 듣다가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일터에서 생긴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궁리도 하였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노닐 수 있음은 대단한 즐거움이며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딜쿠샤나 심우장, 수연산방, 두문즉시심산 같은 문패와 현판들은 단순히 얼굴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속 깊은 사연과 가치를 지닌 무형자산이 아닐까.


비록 요즘의 주거 환경은 물리적으로도 문패와 현판을 걸기가 더 어려워졌지만, 옛사람들의 마음만은 현대에도 유효해 보인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좋은 본보기로 추천하고 싶다.


2021년 613일(일)

글 | 손훈

편집 | 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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