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우유 주문하는 거 깜빡했네.” 우유를 좋아하는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우린 지금 전쟁 중이야. 우유가 없으면 집에 있는 두유라도 마시는 게 어때?” 현관 앞에 배송된 식료품을 옮기며 내가 답했다. “그런 당신은 크루아상 먹겠다고 비 오는 날 빵집까지 다녀왔잖아.” 대답이 궁해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무 일찍 갔는지 크루아상 아직 안 나왔더라. 꽈배기 사 왔으니 같이 먹자. 우리에겐 고열량의 전투식량이 필요해.”
한 달 전 아기가 태어났다. 출생의 감동은 잠시, 육아의 고충이 빠르게 일상을 덮었다. 육아는 체력과 정신력 싸움이다. 쉬이 잠들지 않는 아기와 씨름하다 보면 날이 밝아오기 일쑤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어긋난 기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살면서 남에게 이렇게 바라면서 뭔가를 반복적으로 한 적이 있던가. 아기가 120ml의 모유 또는 분유를 잘 먹고 잘 트림하고 푹 자기를 바라지만 내 바람은 종종 실패한다.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고 체온을 재고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하다 보면 다시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전쟁에 임하는 자세가 된다. 분유 포트에 섭씨 40도의 물이 가득 차 있는지, 소독된 젖병은 충분한지, 기저귀나 가제 수건은 가까운 곳에 있는지 등 무기고를 살피는 마음으로 챙긴다. 한낮이든 새벽이든 아기는 배고픔과 불편함을 참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살기 위해 얼굴이 빨개지도록 최선을 다해 운다.
전쟁통에도 낭만은 있다.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을 보노라면 내 부모의 모습이 겹친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부모님도 꽤나 고생하셨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육아는 어린아이(兒)를 기르는 게 아니라 나(我)를 기르는 일이라던데, 어느 순간 인생의 퍼즐 하나를 새로 맞춘 기분이다.
어젯밤에는 아내와 단둘이 출생 후 처음으로 산책을 했다. (잠시 아기를 맡아주신 장모님 덕분이다.) 집 근처에 수령이 45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어느새 초록잎이 무성하게 돋아났다. 초록잎 아래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근데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는 거 사치야. 이렇게 건강히 태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잖아.” “맞아, 요즘은 하루하루 커가는 게 벌써 아쉽기도 해.” 우리 부부는 2년 전 유산을 경험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모든 고생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돌이켜보면 나는 겉보기엔 모범생이었지만 은은히 부모 속을 썩이는 아이였다. 나 같은 자식을 낳을까 걱정되어 한때 싱글의 삶을 고집한 적도 있다. 잘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노르웨이까지 가겠다고 선언할 때 부모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을지 이제는 안다. “누굴 닮아서 어쩜 그리 말을 안 듣니?” “부모가 어떻게 쿨해질 수 있니? 너도 자식 낳아봐라. 그래야 내 맘 알지.” 당시 어머니의 말들을 되새겨본다. 아내의 출산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이번 어버이날은 신생아를 보느라 부모님과 함께 식사도 못했다. 아마도 아침에 신문을 챙겨보고 계실 부모님께 이렇게나마 감사 인사를 드린다. 소설가 박완서는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땐 언제고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밤도 아기는 이불 속이 덥다고 칭얼댄다. 그가 잠들 무렵, 조용히 그 이불을 다시 덮어준다. 나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 2020년 10월부터 조선일보의 ‘밀레니얼 톡’ 필진으로 합류해 짧은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마침 출산 휴가 중에 순번이 돌아와 6회 차 원고를 썼고, 이 원고는 곧 나올 두 번째 책의 에필로그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진 않지만, 조금씩 아기와 친해지면서 거꾸로 제 부모의 마음을 살피고 있습니다. 아마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전 쿨하게 대하지 못하겠죠. 그땐 왠지 저도 이 말을 반복할 것 같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쿨해질 수 있니? 너도 자식 낳아봐라. 그래야 내 맘 알지.”
글 | 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