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안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훈 Mar 20. 2022

습관 하나 고치려다 문득

블라인드 너머로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려는데 무슨 형체가 어른거렸다. 아내였다. 머리맡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


“ 여보, 소변볼 때 변기에서 앉아서 누면 안 돼? “

“ 갑자기 웬 소리요? ”

“ 다른 집 아빠들은 앉아서 눈다던데 “

“ 아니, 당신이 언제 보았소? “

“ 그게 아니라 엄마들이 다들 그러데요. 변기 밖으로 나와서 냄새도 나고 청소하기도 그러니 깨끗이 삽시다요 “


눈 뜨자마자 아내의 갑작스러운 말에 기분이 상했다. 육십이 넘도록 서서 볼일을 보다가 어떻게 앉아서 보란 말인가. 남녀를 구별하는 일중 하나가 화장실 변기 사용에 있는데 나이가 들어가니 위생문제가 대두되는 모양이다. 오래된 생활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만 아내 말도 일리가 있어 노력해 보마고 대답하였다.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데 순서가 뒤바뀌어서 나왔다. 괄약근 조절이 잘못되어 원하지 않은 일부터 치른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무심결에 해오던 습관 하나 고치려다가 하루 종일 뒤숭숭하게 보내고 나니 그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이면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미는 게 첫 일과이다. 매끈해진 턱을 만지며 수염을 그냥 놔두면 안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어느 책에선가 남녀의 성징(性徵)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여성은 유방, 남성은 수염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남성들의 말쑥한 차림과 단정한 용모는 대인관계에서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사라진 수염은 남성성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의 여성 상위시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네팔의 대표적 트레킹 코스인 안나푸르나봉 코스를 갔을 때이다. 9일간을 산속에서 걸으며 게스트 하우스에서 숙박하는 자연인 생활이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수염을 깎지 않고 그대로 두고 싶었다. 하루 이틀을 지나니 까칠한 수염이 돋아나고 점점 코밑을 하얗게 뒤덮기 시작하였다. 잔디 결을 만지듯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감촉이 여물고 느낌도 완강하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수북해진 수염으로 인해 얼굴 모습도 많이 변해졌다고 동행한 아들이 말해 주었다. 문득 나 자신이 돌 칼을 든 원시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귀국하는 날, 거울 앞에서 작별주를 마시며 수염과 아쉬운 면도식을 거행하였다. 그 이후로 일주일 이상 둘레길을 걸을 때면 수염을 내버려 두고는 남몰래 원시(原始)의 느낌을 즐겼다. 지리산 둘레길 240킬로를 2주간 완주하고 나서 완주증을 받았는데, 그 사진 속 얼굴은 놀랍게도 내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습관이라도 원하지 않은 습관은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바뀔 수가 있음을 알았다.




지하철 화장실에 들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남성용 소변기 하단에 왕파리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그 파리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왜 파리가 여기 있을까 궁금했지만 옆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민망하여 슬쩍 곁눈질하니 그 왕파리에 ‘조준’하여 볼일을 보는 게 아닌가! 그제야 나의 아둔함을 느꼈다.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량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넛지(Nudge) 이론의 한 예가 되겠다.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선택을 이끌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데 공감이 간다. 지금은 변기 위쪽에 이런 글귀들이 적혀있다. 


"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

" 한 걸음만 더 다가서세요 "

"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


인간 심리를 부드럽게 유도하여 경제적 효과를 거둔다니 대단한 발상이 아닌가.


아내로부터 요청을 받은 지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공중화장실에서는 서서 볼일을 봐야 하고, 집에서는 앉아서 해야 하는데 아내는 내 심정을 알기나 할까. 습관 하나 바꾸기가 이토록 힘든데 인생살이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넛지 이론대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의 고충을 덜어주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어야 할까 보다.  아니다.  이중생활을 하더라도 내 정체성은 지키고 싶다. 가정에서는 조신한 배우자로, 밖에서는 가식 없는 '자연인'으로 당당히 살아가야지.   



2022년 3월 20일(일)  손  훈

매거진의 이전글 가까이 다가와서 좋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