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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Jun 17. 2019

내가 좋아하는 길들

그 날들의 기분, 날씨, 분위기를 회상하며

요즘처럼 걷기 좋은 날들이면, 그간 좋아했던 길들이 생각난다. 한참 전이든, 아주 최근이든. 그때 그 길을 생각하면 그날의 날씨, 그날의 온도, 그날의 분위기, 그날의 기분이 떠오른다. 오늘은 그 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1. 제주 안덕면사무소 앞길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가던 제주는 항상 겨울이었다. 아빠 행사로, 혹은 그냥 가족여행으로 갔던 제주. 하지만 항상 겨울에 갔던 터라, 기억나는 건 뿌연 하늘과 올인 촬영지에 갔다가 맞은 우박. 그리고 한때 대장금 촬영 시기에 겹쳐 민속촌에서 촬영 장면을 봤던 정도. 그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제주를 좋아하는지 감이 잘 안 왔다. 


그러다 취직하고 두 번째 해에 처음으로 여름 제주를 가봤다. 잠깐 흐릴 때도 있었지만, 그리고 덥긴 했지만, 이렇게 맑은 바다와 큰 숲을 가진 섬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었다. 계절마다 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욕심도 잠깐, 다른 곳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루고 미루다 작년 여름에서야 가족과 함께 제주를 다시 찾았다. 


어디를 가볼까 한참을 논의하다 때마침 수국 철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한테 얘기하니 수국 너무 좋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엄마가 수국 좋아하는지는 또 처음 알았네- 싶으면서도 수국 스팟을 여기저기 찾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제치고, 동선에 안 맞는 곳은 제치고, 몇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언제 방문할지 재던 중, 마침 그때 빌린 전기차에 전기가 떨어질 참이라 안덕면사무소에 방문했다. 


길 한가득 수국이 가득이었던 곳.


들어가는 길의 입구는 아주 조용한 동네 어귀라는 인상이었다. 한 달 제주 살기를 할 수 있게 꾸며놓은 것 같은 주택들이 눈에 띄었다. 길에 들어서니 수국이 본격적으로 피어있었다. 아직은 조금 덜 핀 것도, 더 피고 져버린 것도 섞여있었지만 양쪽 길이 모두 수국 밭이었다. 면사무소 충전기 앞에 차를 대놓고 슬슬 걸어 나왔다.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된 때라 땅은 조금 젖어있었지만, 그 덕에 수국은 더 싱싱해 보였다. 엄마도 아빠도 꽃받침을 시켜두고 사진을 찍어줬다. 그냥 길가에 핀 거라 꾸며놓은 사진스팟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면사무소에 딸려있는 운동장은 꽤나 넓어 보였다. 호두를 데리고 뛰어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면사무소에서는 주말 문화수업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나중에 여기 와서 한 일 년 살까, 하고 작당을 했다. 아주 평화로웠다.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었다. 다음 수국 철에  또 와봐야지, 싶었는데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또 올해 수국 철이 거의 끝나가 버린다. 내년에는, 혹은 내후년에는 다시 와봐야지. 




2. 글리브 포인트 로드


시드니에서 교환학생을 했었다. 시드니에서도 새해가 되면 크게 불꽃놀이를 한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바라볼 수 있는 보타닉 가든은 낮- 이나 늦어도 초저녁에는 가야 입장이 가능하다. 저녁시간에 아르바이트가 있어 친한 언니들이 미리 자리를 맡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계속 불안하다고 연락이 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입장을 아예 막는 것 같다고, 빨리 오라고, 이러다 못 들어오겠다고. 


불길한 기분은 적중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겨우겨우 채우고 부랴부랴 가는데 못 들어올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타지에서 혼자 맞을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어쩌지, 하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우리 집이 있던 길의 끝까지 걸어가면 바다가 보이는 공원이 있는 것 같았다. 바틀 샵이 닫기 전에 부랴부랴 맥주를 사고,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는 바깥에서 술 마시는 게 불법이라 종이 가방에 꼭 싸가지고. 


도착한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였다. 친구들끼리 온 사람, 가족끼리 온 사람, 너도나도 즐거워 보였다. 다행히 맥주나 와인을 마시는 사람도 여기저기 보여 안심했다. 나도 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맥주나 한 모금하려는데, 아뿔싸. 돌려 따는 맥주가 아니었다. 더 우울해졌다. 혼자 와서 맥주도 못 먹다니, 이럴 수가. 부랴부랴 병따개 없이 맥주병 따는 법을 검색했지만, 그 방법에서 알려주는 그 어떤 방법도 맨손으로 할만한 건 안 보였다. 


두리번거리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 또래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무리에게 다가갔다. 혹시 병따개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쓱 내밀었다. 맥주병을 건네줬더니 반지를 낀 손으로 똑! 따버렸다! 오!!!!!!!!!!!!

(나중에 찾아보니 반지 모양의 병따개가 있더라. 나도 꼭 장만하리라, 누군가가 필요할 때 멋있게 따주리라 다짐한 지 어언 6년인데, 아직도 사지 않았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활짝 웃는 얼굴로 땡큐 인사를 건네고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으니 저 멀리에서 손톱보다 작게 불꽃이 터지는 게 보였다. 더 이상 우울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한 살 더 먹은 날이 되었다. 좀 더 어른이 된 기분으로, 갈 때보다 짧게 느껴지는 길을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가본 지 벌써 6년은 되었지만, 글리브 포인트 로드는 정말 멋진 곳이다. 내가 아주 좋아한 멕시칸 음식점이 두 개나 있고, 사람들이 줄 서서 사가는 피시 앤 칩스 가게도 기억에 남는다. 초등학교에서는 주말마다 장을 선다. Touristic 한 곳이라기엔 중심지에서 좀 멀지만, 다시 놀러 간다면 꼭 그 근처에서 다시 묵고 싶다.)




3. 플라야 델 카르멘을 내려가는 길


멕시코에 아주 작은 동네인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서핑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초급자용 파도가 잘 친다는 이야기에 멕시코시티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갔다. 그 경비행기는 타는 사람도 몇 없는데 5시간인가가 지연됐다. 밤늦게서야 탄 비행기에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내려서도 동양인, 그리고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캄캄한 밤에 겨우 공항에서 내리니 덥고 습한 공기가 후끈 다가왔다. 여차저차 공항에서 운영하는 밴을 타고 동네로 내려갔다. 예약해둔 호스텔은 작고 더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방에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괜한 허세로 온건가, 후회가 됐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하고 눈을 붙였다. 


다음날 아침 호스텔 카운터에 가서 근처에 서핑 샵이 있는지 물어봤다. 바로 전화해서 예약을 잡아줬다. 예상치 못한 빠른 전개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그 친절에 감사했다. 대충 수영복을 챙겨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 오전인데도 햇볕은 뜨겁고 날은 더웠다. 이층이 넘는 건물이 거의 없었다. 진짜 시골이라 무서울 법도 했을 텐데 나는 근야 그곳이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뭐 이런 데를 왔는지. 멀뚱멀뚱 구경하며 서핑 샵에 도착했다. 친절하고 영어가 모국어인 것 같은 (그러니까 아마 미국 사람이었던 것 같은) 직원이 반겨줬다. 옷 갈아 입고 가면 바로 할 수 있다고 했다. 갈아입고 나오니 햇볕에 잔뜩 그을린 해맑은 얼굴을 한 강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안 타본 사이즈의 펀보드를 들고는 이거 타면 될 거라고, 따라오라고 했다. 못 타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면서도 보드를 대신 들어준다니 고마웠다. 


건물 뒤편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보드 들어주는 사람도 있겠다, 계단 아래의 해변을 내려다봤다.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예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광대에 힘이 잔뜩 들어가 내려가지를 않았다. 입꼬리도 계속 실룩댔다. 보드 위에 타서 바닷물 위에 둥둥 떠서 거꾸로 해변을 바라보니 더 아름다웠다. 천국에 왔다 싶었다. 여기서까지 서핑을 하겠다고 허세를 부린 내가 자랑스러웠다. 사흘인가 나흘인가를 그런 아침을 반복했다. 덥고, 습하고, 뜨거웠지만, 그 계단만 만나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한 길이다. 

맑은 물, 야자수, 화려한 꽃으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바닷가. 심지어 파도 사이즈도 완벽하다. 구경만 해도 행복한 곳.


이렇게 보니 뚜렷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여행길이다. 낯선 것을 만날 때의 작은 불편함, 그리고 그 불편함을 뛰어넘는 신선함과 충만함.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다시 그런 여행길에 오르고 싶다. 어서 빨리 그 날이 오길. 일상에서도 여행 같은 만남을 주는 일이, 길이, 사람이 생기길. 깊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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