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生form死
6월의 마지막 날. 어느새 또 한 해의 반이 훌쩍 지나버렸다. 밀린 일기를 끄적대며 내가 이 반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살아왔다'라고, 능동형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역시 시간은 내 감각보다 빨라서 벌써 2019년의 반이 끝났다는 게 믿기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6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써놓은 일기를 들추니(물론 매일 쓴 건 아니고 밀려 쓴 것이 다반사지만) 내가 어떻게 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긴 했구나 싶다. 새로운 사람들도 만났고 새로운 일도 접했고 새로운 경험도 많았다. 무엇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반기(半期)였다. 하나로 통틀어 정리할 순 없겠다만 어떻게 구겨 넣어보자면, 유난히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사람들에게 많이 데였다.
폼 1 form
[명사]
1. 사람이 어떤 동작을 할 때에 취하는 몸의 형태. ‘자세’로 순화.
2. 겉으로 드러내는 멋이나 형태. ‘모양’, ‘자태’로 순화.
3. =서식(증서, 원서, 신고서 따위와 같은 서류를 꾸미는 일정한 방식). ‘서식’, ‘형식’으로 순화.
영어를 그대로 발음한 외래어라 이것저것으로 순화하라는 말이 눈에 띄지만, '폼 잡고 있네' 할 때의 '폼'에는 어쩐지 '자세'나 '모양' 같은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미묘한 비웃음이 서려있다. 본래 본인의 것이 아닌 어떤 무언가를 흉내 내는, 그러면서 그것이 마치 제 것인 양 으스대는 사람을 향한 코웃음.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폼생폼사'라는 말도 비슷하다. 사전에 따르면 '겉으로 드러나는 멋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태도나 생각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속이야 어떻든 겉모습만 멋지면 된단 마음으로 살아가는 태도일 테다.
물론 인간은 모두 '폼'에 신경 쓰며 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신경 안 쓰고 사는 이가 몇이나 될까. 제 집 안방은 마구 어질러져있어도 밖에 나갈 때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 법이다. 혹여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있더라도 잘 단장하면 '폼 나게' 보일 수 있을 것이고, 기실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살고 있다. 내놓기 부끄러운 것은 조금 감추고,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신경 쓰고, 좀 더 멋진 인생으로 비치길 바라며. 그러나 그간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사소한 순간들이 영 부끄러워질 정도로 '폼생폼사'하는 사람들에 많이 질리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들을 보았노라고 비난하고픈 마음은 아니다. 나보다 조금 더 치우친 사람들을 만나 뼈아픈 자기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시작은 폼을 잡는 것이어도 좋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는 아는 체라도 하고 젠체해야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일단 출발점으로는 나쁘지 않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내가 지금 잡고 있는 폼을 어떤 이상향으로 놓고, 조금씩 그것이 어떤 '척'이 아니라 진짜 내 모습이 될 수 있게 따라잡는 거다. 비록 100%는 아니더라도 어설프게나마 폼을 잡다 보면 그 방향으로 조금씩 가까워지지 않을까. 아직 나는 그저 잘난 '척'하고 있을 뿐이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실을 다져서, 종국에는 정말 잘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 간극을 좁혀가기보다 아예 무시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다. 내 현재와 이상 사이의 간극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냥 포기해버린 사람들. 겨우 흉내만 내고 있었으면서 마치 그것이 제 진짜 모습인 양- 원래 나는 이렇게 멋진 놈이라고, 폼만 잡으며 스스로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 글쎄, 따지자면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일까. '나 이런 사람이야'하고 폼을 잡다가 그 틀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발전이란 없었다. 뭐 이미 충분히 멋진 사람이기 때문에 발전 따위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없는 법. 주위에 널려있는 스스로의 불완전성에 대한 근거를 모조리 무시해가며 악착같이 허상만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어딘가 애잔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나도 여전히 폼 나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내가 멋있는 척 잘난 척 그냥 '척'하는 대로 정말 멋있어지고 잘나질 수 있다면. 그러나 인생의 모든 면이 그렇듯, 폼만 잡고 앉아있다가 공짜로 쉽게 얻어지는 건 어디에도 없을 거다. 어떤 '척'을 하는 건 쉬워도 진짜 그런 자세를 뿌리 깊게 내면화하기는 쉽지 않다. 골프나 요가 같은 운동이랑 비슷하려나. 어디서 많이 본 것을 얼추 따라 하기는 쉬워도 -운 좋게 운동감각이 좀 있으면 꽤 그럴듯하게도 따라 할 수는 있겠으나- 진짜 그것이 내 실력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이미 폼을 잡고 있던 상태면 더더욱 어려울 수도 있다.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딱히 겉으로 보기엔 차이가 없으니 이른바 '내실'을 공고히 다질 때까지는 많은 인내심과 집중력이 필요할 테고. 가끔은 어설픈 흉내가 들켜서 매우 쪽팔린 상황을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폼만 잡다 포기해버리고 싶진 않다.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바보같이 만드는지 뻔히 보았으므로 더더욱. 여전히 어리석어서, 폼 같은 거 하나도 잡지 않고 바닥부터 시작하겠다는 다짐은 못하겠다. 앞으로도 나는 어설프게나마 폼을 잡고 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짜 내 모습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말아야겠다. 진짜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알기에, 가끔은 '폼'이 무너지고 '척'이 들켜도 '아직은 내가 이것밖에 안돼서,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하고 웃으며 인정할 수 있었으면. 그 어렵고 부끄러운 모든 단계를 나 자신으로 인정하고 품을 수 있었으면.
그렇게 의연하게 살고 싶다. 당분간 어설픈 폼으로 살더라도, 폼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단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