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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Apr 02. 2023

대충

영화 '슬램덩크 더 퍼스트'를 보고

사무실 건물 20층에는 카페와 오픈형 도서관이 있다. 출근하자마자 가방과 외투를 걸어두고 일을 시작하기 전 동료들과 티타임을 나눈다. 업무 시간 중간에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재충전이 필요하면 20층 카페의 바(bar) 자리에서 일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고마운 곳이다. 그날은 유난히 버스와 지하철을 때맞춰 탄 덕분에 평소보다 15분 이상 일찍 출근했다. 혼자 20층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왼편 책꽂이에 낯익은 책이 보였다.


슬램덩크의 원작 만화책이다. 


지난 달 슬램덩크 극장판인 ‘슬램덩크 더 퍼스트’를 영화관에서 봤다. 나는 이 만화가 한국에서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던 90년대 초에 태어났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절이라 예능과 드라마에서 심심치 않게 패러디되곤 했던 ‘강백호’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과 그의 명대사, '왼손은 거들뿐'은 정도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만화의 내용을 잘 알지 않아도 영화가 꽤 볼 만하다는 평을 들어 극장을 찾았다.


슬램덩크에는 요즘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그림체가 다르다. 만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 – 잉크펜의 뾰족뾰족한 촉감과 잉크의 질감이 살아있다. 흰색 스크린에 북산고 농구부 다섯 명이 한 명씩 등장할 때, 마치 커다란 만화책이 스크린으로 커진 느낌이라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흐름은 우리가 바꾸는거야!!’

‘태섭군, 여기는 자네의 무대입니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등 상대 팀이나 선수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세기말의 허세나 과장하는 대사가 나왔다. 유치했지만 픽 웃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 낭만 가득한 대사가 구질구질한 현실을 잊는 데 꽤 도움이 되니까. 영화의 생각을 거두고 서둘러 만화책을 꺼내 펼쳐보았다.



책의 끝에서부터 페이지를 휘리릭 펼치다 멈췄다. 바로 이 장면이 나왔다. 앞뒤 사정은 모르지만,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서태웅과 강백호, 둘은 당당하게 ‘얼버무리면 돼’, ‘조용히 수습하면 돼!’라고 답했다. 손바닥만 한 만화책 속 한 컷이 어떤 찝찝함을 몰아냈다. 내가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었다. 한 마디로 대충 넘어가고 싶다는 뜻이다. 대. 충.


회사에서 문서를 만들거나 메일을 쓸 때 종종 하나쯤 빠뜨리곤 한다. 아차 싶어 ‘죄송해요. ㅠㅠ 지금 바로 다시 보내드릴게요.’라고 메신저를 보낸다. 때론 내가 반대 상황에 놓여 다른 사람의 실수를 짚어낸다. 일을 꼼꼼히 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머릿속을 초기화하고 오로지 해야 하는 일만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뇌가 금방 흐물흐물 해져버린다.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황이라 중요한 약속이나 할 일을 까먹는 부작용이 생긴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는 일이 있으면 몸이 바짝 긴장한다. 한 번도 작성해보지 못한 기획안이나 보고서 같은 문서를 만드는 것 말이다. 남들보다 다소 예민한 사람이라 계획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패닉이 온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들어가 온갖 서랍을 다 열어보며 필요한 정보를 찾는다. 이런 살 떨리는 일을 유연하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생전해보지도 않는 일을 맡아도 마치 여러 번 가본 듯한 길인 것마냥 정확히 목적지를 찾는다. 그러곤 ‘대충’ 이 정도 하면 된다며 엄청난 일을 광고주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면 대충 얼버무리지만 결국은 우문현답한다.


임기응변을 해내는 사람은 대개 자기를 믿고 확신하는 – 자기확신이 있다. 내 생각이 틀렸다고 의심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일 앞에 차분하게 맞선다. 가끔 해외 에이전시와 일을 하면, 특히 미국인이나 유럽인에게 비슷한 아우라를 느끼곤 한다. 그들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디자인 컨셉안이나 아이디어를 낸다. 우리는 삼십 페이지 이상 분량으로 PPT를 채우며 논리를 입증하려 애쓰지만, 그들은 열 장도 채 되지 않는 내용을 가져와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발표하는 내내 자신감에 차 있다. 가끔은 속된 말로 ‘개소리’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확신’을 수액처럼 맞을 수 있다면 요즘은 자주 맞고 싶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메일을 여러 번 확인하고, 메신저로 상대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두세 번 다시 읽어본다. 꼼꼼함 이상의 강박이다. 내가 맞을까, 맞지 않으면 망신인데, 대답을 번복하고 싶지 않다. 부정적인 결말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재확인’을 한다. 대충하고 싶은데, 대충 얼버무리고 싶은데. 아직 ‘대충’해도 될 정도로 일에 능숙하지 않다. ‘왼손은 거들 뿐’ 정도가 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아니 그 시간만큼 쌓으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까.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 만화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붉은 머리의 강백호를 보면서 그 확신의 조금만큼을 나에게 떼어오고 싶었다. 대충 얼버무려도 나를 믿는 마음, 그 마음 말이다.


몇 주 전에 써두고 올렸습니다. 브런치가 '브런치스토리'로 이름을 바꿨더라구요. 게으르지 않게 더 꾸준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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