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석빌라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by 변방의 공돌이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2015년 독립출판 한 <제주의 작은 작업실>은 절판 되었습니다.
책은 사라졌어도 글만은 남기고 싶어 브런치에 옮겨놓습니다.


제주도 동쪽 시골 마을의 작은 빌라.
100여 세대가 모여 사는 세 동짜리의 이 빌라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대단지 공동주택이다.
위치는 생뚱맞게도 읍내에서 약간 벗어난 4차선 일주도로 옆이며, 2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연식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낡았다.
거기다가 매일 일출을 보며 삶의 의욕을 가지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시공사의 세심한 배려로 베란다의 창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한낮의 햇볕을 받지 않는 추운 집이다.
힘차게 떠오르는 일출의 기운을 받으며 긍정적인 삶을 살라는 시공사의 깊은 속이 아니고서야 에너지 효율이 좋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은 입주 희망자들이 줄을 선 인기 주택이다.
도시나 시골이나 재테크의 기술은 유사하여 재건축이나 재개발 같은 호재와는 무관한 이 오래된 빌라를 굳이 매매하려는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촌스러운 인테리어로 대표되는 꽃무늬 벽지와 체리색 몰딩을 뜯어내고 모던이나 앤틱이나 북유럽 스타일로 교체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하물며 수백 톤에 달하는 똥과 오줌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 변기조차 그대로 사용하는 세입자들이 대부분이다.
오래 된 빌라에 사는 세입자의 근검절약이란 그런 종류일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멋들어진 전원주택에 살게 될 날을 위한 인내의 방식 또한 불편과 불결을 참아내는 것이리라.

주민들 중 상당수가 트럭을 갖고 있으며, 그 트럭에는 00화학, 00기계 같은 글자가 붙어 있다.
또 상당수는 고급 승용차를 갖고 있다.
위든 아래든 스스로들 계급체계를 만들어 내고, 같은 계급끼리 무리지어 살고 있는 도시의 공동주택과는 다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주택이다.
생계형 트럭과 고급 승용차가 공존하는 주차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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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농가주택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이 빌라로 이사를 왔다.
함께 사는 고양이 마리는 좁아서 답답해했고, 우리는 낮은 담장 위로 떠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농가주택에 사는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 시골에서 유일한 도시형 주택단지를 선택하였으니 그 이름도 거룩한 반석빌라 되시겠다.
보증금 300만원, 월세 37만원.
30만원이 대세인 다른 집보다 월세를 7만원이나 더 받겠다는 집주인의 심보가 어처구니없었지만, 우리는 군소리 없이 계약을 했다.
우리는 소수의 공급자가 요구하는 것을 닥치고 수용해야 하는 다수의 수요자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한 우리는 도저히 사용할 자신이 없는 변기와 수전을 교체하고, 바람과 먼지를 막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베란다의 가림막을 창문으로 교체하는데 자비를 털었으며, 매달 다른 집보다 월세를 7만원 더 내고 있다.

2년 동안 살았던 농가주택과 비교해서 빌라는 장점이 참 많다.
방역을 하지 않아도 벌레가 들끓지 않고, 불쑥 찾아와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불청객도 없다.
집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현관문만 걸어 잠그면 훌렁훌렁 벗고 다녀도 되는 자유가 보장된다.
운치와 낭만을 기대하며 시작한 농가주택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사생활 보호가 전혀 안 되는 낮은 돌담과 누구나 쉽게 열고 들어오는 대문 앞에서 그것은 다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이 빌라의 견고한 철제 현관문은 허락 없이 열었다가는 범죄자가 될 것이라는 강경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끔은 불시에 초인종을 누르는 멀쑥한 할아버지들이 있지만, 정체모를 종교집단의 선교활동 치고는 집요하지 않아서 크게 불편하지도 않다.
그 할아버지들한테는 이 시골보다는 차라리 중동국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가가호호 두드린 현관문 앞에서 얼마나 험한 욕들을 자주 들어 먹었을까.
저래 주눅 들어서 어디 가서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전하겠나.

집이 무너질 듯 뛰어 다니는 위층 아이들이 내는 층간 소음도, 해질 무렵 주차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도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다.
예민하고 까칠하기로는 제주도에서 백 번째 안에는 들 자신이 있는 나지만 위층과 주차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음 따위는 신경도 안 쓸 정도로 사생활 보호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서 제주도의 농가주택에 살고 싶거나 혹은 작업실을 마련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돌담은 꼭 키보다 높게, 대문은 견고하게 하라고 말이다.
언젠가 농가주택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면 그 때는 나도 그럴 작정이다.
철조망까지 세우...... 철조망은 좀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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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에 내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다.
아니 특별한 용도가 없는 거실에 책장과 책상을 두고 거기서 작업을 하고 있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은 아니다.
책장 위로 뛰어다니거나 카펫이 깔린 바닥에 누워서 내 다리를 긁어 대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방해하기도 한다.
내가 바라던 작업실은 이런 오래된 빌라의 조그만 거실이 아니었다.
실은 바닷가 마을의 조그만 창고가 작업실이라면 참 좋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갈매기가 보이는 위치에 창을 내고, 그 창 옆에 넓고 긴 6인용 책상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2인용 소파를 놓고, 가운데에는 난로를 놓고, 또 한쪽 벽에는 조그만 주방을 만들어서 커피 도구를 놓아 둔 그런 공간 말이다.
작업실이라고 해서 일 년 365일 작업만 할 수 없으니 거기서 할 놀이를 몇 개 구상해 놓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대여섯 명 정도의 이웃 친구들이 모여서 비정기적인 독서모임을 갖는 것이다.
커피와 쿠키를 준비해 놓고, 난로에 미리 장작을 피우고 기다리고 있으면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고,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시간이 되면 소리 없이 일어나 사라지는 그런 놀이 말이다.
조건을 하나 붙이자면, 어려운 이야기들로 채워진 감상문 발표나 근엄하고 엄숙한 독서 토론 같은 건 절대 금물.
하지만 현실에 있는 내 작은 작업실의 창밖으로는 4차선 도로와 당근밭만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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