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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Sep 19. 2022

내가 숨어 살았던 이유

신장 161cm가 가장으로 사는 법


"네 들어오세요"

우리집에 파란 모자를 쓴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집에 외간 남자를 들이다니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어디서 나타났다고 했죠?"

"거실에서 한 번 화장실에서 한 번이요"

"확인해 볼게요"


남자는 집안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 우리집 거실에서였다. 갑자기 검은색 물체가 빠른 속도로 휘리리릭 지나가길래 카펫을 휙 들쳐보았더니 세상에.. 2cm 조금 안 되는 바퀴벌레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질러대면서 식탁 위에 있던 두꺼운 책으로 내리쳤더니 잠잠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먹거렸다. 책을 들춰 죽은 바선생을 집어 들어야 하는데 그게 훨씬 더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집엔 나밖에 없으니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책을 들춰보니 지구 최강의 생명력을 지닌 바선생답게 온몸이 찌그러진 채로 다리를 사정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 뒤, 아침에 샤워를 하는데 세면대 위에서 분주하게 걸어가는 바선생을 또 만난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바선생이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까지 뜨거운 물을 뿜는 샤워기를 들이대며 비명을 질렀다.


그날 출근하자마자 세스코에 전화를 걸었고 파란 모자를 쓴 세스코맨이 집으로 찾아왔다.


"음.. 우선 신축인데다 현재까지는 이 집에서 서식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요 외부에서 들어온 것 같네요 배관을 통해서 유입되거나 옆집에서 넘어오는 경우도 있고 택배 박스에 숨어있다가 유입되는 경우도 있고요"


세스코맨은 집안 곳곳의 문틈, 수납장틈, 벽틈 사이에 바선생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먹이를 온 집안에 발라두면 없던 바퀴도 집안으로 다 몰려들지 않을까요?"


"일시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먹이 속에는 약이 들어있어요 얘네들은 먹이를 먹으면 동료들한테 가서 토해내 나누어 줘요 그럼 다 같이 약을 나눠 먹는 거예요 약발은 하루 정도 지나서 나타나는데 그렇게 죽은 애들의 시체를 또 다른 애들이 먹기 때문에 연쇄 살충의 효과가 있는 거예요"


그의 이야기를 몰입해서 듣다 보니 바선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만찬을 즐기는 장면이 상상되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장 180cm의 건장한 연쇄살충마와 함께 있어서 든든했다.


"어? 이 방은 불이 안 들어오네요?"

침실에 들어간 세스코맨이 물었다.


"아.. 여기는 형광등이 나가서.. 불이 안 켜져요"


나는 쭈뼛대다가 세스코맨에게 형광등을 내밀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한 달 동안 천장에 손이 닿지 않아서 형광등을 못 갈고 있었거든요.."


세스코맨에게 무례한 부탁이라 해도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떠나면 침실은 몇 달간 더 암흑 속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세스코맨은 측은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네 해드릴게요 의자 가져오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세스코맨이 형광등을 가는 걸 보니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장신의 남성도 한껏 손을 뻗어야만 가능한 높이였다.


나는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왜 형광등을 갈지 않았을까? 관리사무소로 찾아가 부탁을 해도 됐었지만 굳이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집은 유령의 집이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유령이 사는 집


내가 유령이 돼버린 이유는 열일곱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집은 1층 주택이어서 창문이 조금이라도 열려있으면 내부가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어느 날 살랑거리는 바람이 좋아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창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낯선 남자가 바지를 내리고 방범 창틀에 매달린 채로 나를 들여다보며 수음을 하고 있었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방충망을 찢고 베란다에 널어둔 내 속옷을 훔쳐 갈 때도 있었고, 새벽에 홀로 거실에 앉아 있으면 창문 밖에서 수음을 하면서 중요 부위에 라이터를 비추며 신호를 보내는 미친놈도 있었다.


우리집은 파출소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엄마가 집안 곳곳에 파출소 직통 번호를 써 붙여놨지만 신고전화를 해도 잽싸게 달아나 소용이 없었다.


훗날 한 TV 프로에서 일명 "바바리맨" 이라는 작자들 사이에 인터넷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고 자기네들 기준에서 재미있는(?) 스팟을 정해 서로 공유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적이 있었다.


방송을 보고 추측하건대, 그 당시 내 방은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공유된 스팟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가장 안전해야만 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장 위험한 장소가 돼버린 건 나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줬다.


이뿐만 아니라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귀가하던 길에 "교복을 입은 년"이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어떤 남자한테 뒷목을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가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반항했고 남자는 승용차 본네트 위에 나를 눕힌 채로 있는 힘껏 목을 조르던 중, 근처 고깃집 사장님께서 구해주셔서 간신히 살았던 적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라고 자부하지만 그 명성과는 다르게 나의 인생은 녹록지 못했다.




초식동물도 각자 나름의 생존 방법이 있듯이 어릴 때부터 극한의 위험에 노출되다 보니 온몸의 감각 센서가 발달되기 시작했는데


늦은 밤은 물론이고, 대낮이라도 인적이 드문 곳은 주위 50미터 반경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본능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몇 년 전 제주도에 홀로 여행을 갔을 때 대낮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산길을 홀로 걷는데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을 쌩 지나가더니 100미터 앞에서 시동을 끈 채 한참을 정차하고 있길래 감귤밭에 들어가 차가 사라질 때까지 숨어있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대낮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11년간 자취를 하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유령처럼 살았던 것이다.


나의 일상생활 속 당연한 습관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1. 엘리베이터에 남성과 둘이 타게 된 경우 남성이 먼저 층수를 누르는 걸 확인한 후에 누른다.


2. 아무도 없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할 때 모든 칸을 열어서 혹여나 사람이 숨어있는지 확인한다.


3. 집에 들어갈 때는 복도에 아무도 없을 때를 틈타 잽싸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4. 모든 택배나 배달은 비대면으로 해놓고 모르는 사람이 벨을 누르면 없는척한다 (어차피 꼭 필요한 용무는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다)


5. 이웃들과 최대한 마주치지도 교류하지도 않고 유령처럼 산다.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 별난 행동들이 나에겐 그동안 학습된 생존본능이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살던 유령은 바선생에게 항복하고 결국 세스코맨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자~ 작업은 다 끝났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혹여나 또 보이면 전화 주세요 방문드릴게요! 그럼 32만 원 결제해 주시면 됩니다"


집안에 "파란 모자 수호신"을 모신 기분이라 생각보다 32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괜스레 침실 형광등을 껐다 켰다 해본다. 깜깜한 유령의 침실에 오랜만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유령은 고작 형광등 하나 스스로 갈아 끼우지 못해 아쉬운 부탁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졌다.




살다 보면 오늘처럼 1인 가구의 가장이기엔 너무나 열악한 피지컬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날이 있다.


"걸을 때 씩씩하게 걸어! 힘 없이 걷는 게 범죄의 타겟이 될 수 있데 항상 다리에 힘주고! 팔 힘차게 흔들면서!"

문득 친구가 내게 신신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파란 모자 수호신이 떠나버린 저녁,

161cm, 48kg의 조그만 존재는 깊은 한숨으로 자괴감을 뱉어냈다.


하지만 하찮아도 어쩌겠는가? 어쨌든 이 몸이 가장인데


내일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한 걸음으로 집을 나설 거다.


"다리에 힘주고! 팔 힘차게 흔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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