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뱃속의 생명과 떠나는 생명 사이에서

혼자 떠나지 않게

by 손샤인

큰아이가 뱃속에 여섯 달쯤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님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모양의 배를 하고 계셨다.

하지만 내 배는 생명을 품고 있었고,

아버님의 배는 병이 차오른 배였다.


간경화 말기.

복수가 차서 물을 빼러 병원에 오셨다.

복수가 차면 배만 부르는 것이 아니다.


몸의 기능 전반이 무너지고, 안색은 점점 검게 변하고

눈동자는 노랗게 물든다.

간이 더 이상 해독을 하지 못하면 피 속의 노폐물이 그대로 쌓인다. 그래서 피부는 흑빛을 띠고,

눈의 흰자위는 황달로 노래진다.


의학적으로는 ‘말기 간부전’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만

실제 환자의 얼굴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 내가 기억하는 아버님은 유쾌한 분이었다.

아픈 몸으로 병원에 오시면서도 늘 농담을 하셨고

주변 사람들을 웃게 하셨다.


“선생님, 내가 배는 만삭인데

아기는 안 나오네?”


아픈 사람들 틈에서 말로 사람을 치료해 주는 분이었다


복수를 처음 빼면 배는 조금 들어가고 숨도 편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가 다시 차오르는 속도는 빨라진다. 알부민 수치를 올리기 위해 알부민 주사를 맞지만 말기에는 그 효과도 오래가지 않는다.

몸은 이미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달쯤 지났을 무렵,

아버님은 보따리를 싸 들고 병원에 오셨다.


“선생님, 나 입원하고 싶어요.”

“혼자 있는 게 너무 쓸쓸해서요.”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은 안다.

사람은 자신의 끝을 어렴풋이 느낄 때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어 진다는 걸.


유쾌하시던 아버님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몸의 기능이 하나씩 꺼져 가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찾으신다는 연락이 왔다.

이미 만삭에 가까운 배를 부여잡고 나는 병실로

뛰어갔다.


아버님은

그날따라 유난히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힘드실까 봐 말씀하지 마시고 주무시라고 했는데

아버님은 순간 내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여 주셨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펼쳐보니 꼬깃꼬깃 여러 번 접힌 만 원짜리 두 장.


“아버님, 이거 받으면 저 감옥 가요. 뇌물이에요.”

“나중에 이걸로 직접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아버님은

“그래도 꼭 받으세요.” 하셨다.


아버님은 가족이 없다고 했다.

늘 혼자라고 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아픈 사람에게는

설명이 아니라 곁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동생에게 연락해 달라며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주셨다.


그날 나는 퇴근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뱃속의 아이와 편히 쉴 수 있었지만,

병실의 아버님은

이 밤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걸

나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말이 아닌 시간으로 함께 있었다.


아버님의 손톱을 깎아 드리고 귀를 정리해 드리고

발을 씻겨 드리고 머리도 단정히 빗겨드렸다.


마치

나와 아버님만 아는

조용한 의식처럼.


아버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시간을 받아주셨다.


그날 밤,

아버님은 그렇게 떠나셨다.


뱃속에 생명을 품고

눈앞에서 생명이 떠나는 걸 본다는 것.


그건

기쁨과 슬픔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동시에 숨 쉬는 경험이었다.


탄생과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사람이 혼자 떠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곁에 앉는다.


말보다

손이 먼저 닿는 자리에서…..


<간경화 말기와 복수>


간경화 말기 환자에게 복수는 단순한 ‘배에 찬 물’이 아니다. 간 기능 저하로 단백질 합성이 되지 않아

혈관 내 삼투압이 떨어지고,

문맥압 상승으로 복강 내 체액이 빠져나오며,

신장 기능 저하로 체액 조절 능력까지 무너진다.


이로 인해

복수는 점점 더 빨리 차오르고,

호흡 곤란, 식욕 저하, 전신 쇠약이 동반된다.


알부민 주사는 일시적인 도움은 되지만

간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


그래서 말기 간경화 환자에게 복수는

곧 ‘삶의 무게’가 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