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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제로 Jun 27. 2023

사실 아버지는 좀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용의자 X의 헌신

가끔 폭군의 딸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한단 말입니다. 물론 '폭군의 딸 선발 과정'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또래 여자들끼리 모여 앉아서 술도 한 잔 하면서 마음을 열고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사후적으로 아, 우리는 모두 폭군의 딸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하여튼 저에게는 그런 대화를 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대화를 통해 다른 딸들의 경험과 제 경험을 비교해 보니, 다른 딸들의 아버지는 대부분 사회적으로는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자도 있고, 물론 성취가 조금 부족한 자도 있으나 대체로 사회적으로 적당한 기능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밤만 되면 가정으로 돌아와서 폭군 행세를 한 것이죠. 저는 '아, 차라리 나의 아버지도 밖에서는 멀쩡한 사람이었더라면' 하고 바랍니다. 제 아버지는 밖에서도 좀 이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그것도 대도시의 도심에서 태어났고(비록 한국전쟁 직후였기는 하나) 평생을 그곳에서 자라고 살았습니다. 직장도 도심에 있었고, 출퇴근길에 백화점도 있고 대형 마트와 쇼핑센터가 있었습니다. 남들에 맞추어 휴대폰도 갖고 자동차도 갖고 인터넷이 되는 PC를 가지며 살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도록, 선글라스를 어디서 사는지 몰랐습니다. 놀랍죠?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빠 안경을 썼습니다. 그 안경을 맞추는 것도 누가(대체로 나의 어머니) 데려가 주어야 가능했기는 한데, 어쨌거나 누구를 따라서라도 안경점에라면 수십 번을 가 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안경점에서 선글라스를 판다는 것을 모르기 어렵지 않을까요? 중년 남자로서 어지간히 패션에 관심이 있지 않은 한 백화점 1층에 가서 선글라스 쇼핑을 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안경점에 가면 선글라스를 판다는 것을 어떻게 몰랐을까요?


제가 열두살 때의 일입니다. 소풍 전날이어서 친구네 집에 모여 장기자랑 연습을 했거든요. 저녁 먹을 시간 전에 어머니가 저를 데리러 왔다가 소풍날 입을 옷을 사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아동학대가 이루어지는 모든 가정의 매 시간이 폭력으로만 편성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지만). 그런데 어머니가 돌연 마음을 바꾸어, 저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아버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실망한 표정을 친구들에게 보이자, 친구들이 재잘재잘 말했습니다. "아빠한테 옷 사달라고 하면 되지! 엄마는 이거랑 저거 중에 하나 고르라고 하는데, 아빠는 고르기 귀찮으니까 그냥 둘다 사라고 하잖아!"


하지만 여러분은 위의 선글라스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아시겠지요. 선글라스를 어디서 사는지를 환갑이 넘도록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 열두 살 딸을 위해 쇼핑을 감히 어떻게. 제가 당시 갖고 싶었던 것은 기분 내기 위한 새 티셔츠 한 장 정도였습니다. 소풍 전날 어린애 티셔츠 한장 사주지 못할 정도로 집안 사정이 어려운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는 열두 살 딸의 옷을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살 난 저는 위의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다른 집의 아버지들은 딸을 데리고 쇼핑을 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이어서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이런 부끄러운 아버지를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요.


이 일화는 너무나 사소한 것이어서 한동안 제 스스로에게조차 잊혔습니다. 그런데 2005년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을 읽다가, 저는 이런 문장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구도는 여전히 세련된 차림이었다. 이시가미는 어디 가면 저런 옷을 살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야스코가 이런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나보다고 새삼 생각했다. 야스코뿐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여자가 자신과 구도 중 한쪽을 선택하라면 서슴없이 구도를 선택할 것이다."


가엾은 이시가미. 어디 가면 저런 옷을 살 수 있는지를 어째서 모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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